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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Sep 06. 2024

추석이 오는 계절의 그 쓸쓸함

(추석이 오고 있다)


따가운 햇살이 내려온 한낮, 어머니는 제방에서 익어가는 동부를 따셔야 했다. 굽은 허리를 부여잡고 누렇게 익은 동부를 수확하는 어머니, 옆에는 허름한 소쿠리가 놓여 있다. 언제나 어머니와 한 몸이었던 머릿수건은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대신하기도 하고, 가끔은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더러는 점심을 챙긴 광주리를 머리에 이기 위한 똬리가 되기도 했고, 수시로 달려드는 모기와 파리를 쫓기 위한 무기이기도 했다.


머리에 얹은 허연 수건, 어머님을 기억하게 하는 추억의 보물 중 하나다. 긴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날, 추석 즈음에 어머니가 하시는 일이었다.


다가오는 추석에 송편 속에 넣어야 할 밤과 동부를 준비해야 하고, 시간을 내어 뒷산에 솔잎을 준비도 해야 했다. 한 해 농사와 조상님께 감사해해야 하는 추석명절준비와 객지에 나간 자식들을 생각하면 그만한 고단함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봄부터 준비해 온 추석명절, 노란 병아리는 어느새 씨암탉으로 변신했다. 모두가 추석을 염두에 둔 어머님의 계산이었다.


여름내 준비해 놓은 붉은 고추를 이고 5일장으로 향하신다. 한 자루의 고추를 팔아야 제물도 준비하고, 자식들에게 입힐 옷가지와 신발을 준비할 수 있다. 어머니와의 그 아름다운 추석은 이미 많은 해를 지나 아련한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당신의 세월이 된 철부지 자식, 어머님의 추석을 기억하고 싶지만 세월은 성큼 변하고 말았다. 알밤을 찾는 아이도 없고, 동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이도 없는 세월이다. 그나마 기억해 주고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또 한 어머니 장모님이셨다.


어렴풋이 어머님의 추석을 나눌 수 있었던 장모님, 흐르는 세월이 길을 막고 말았다. 몇 년 전에 요양원으로 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기어이 아름다운 추석은 기억 속에만 고이 멈추고 말았다. 애처로움과 외로움에 자주 찾아가던 요양원, 사위 아닌 큰 아들이라 불러주던 요양원 할머니들도 코로나가 길이 막고 말았다. 사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서너 번 주고받는 전화가 전부였다. 전화 끝에 하시는 말씀, 전화해 줘서 고맙단다. 무슨 말로 어떻게 전화를 끊어야 할지 망설이면 언제나 하시는 말씀이었다.


뭐가 그리 고마웠을까? 세월은 더 흘라갔고, 코로나가 숨통을 틔워줬지만 쉽게 면회를 할 수 없어 나누는 전화엔 다시 전화를 해 달라 하신다. 전화를 하며 보내는 세월 속에 추석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힘겹게 찾아간 장모님,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온다.


오래전 어머니가 그랬듯이 어머님의 추석을 나눌 수 있었던 장모님의 모습이 그렇다. 가끔은 엉뚱한 말씀으로 당황시키는 모습에 세월을 원망해도 소용없다. 서서히 추석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름다운 추석을 그리고 그 추억을 나눌 사람이 없다. 오로지 추석임을 알고 새로운 문화로의 추석을 맞이해야 한다. 오로지 쉬는 날로서 만족해야 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만남으로서 만족해야 하는 추석이 되었다. 무더운 폭염이 지나고 서서히 찬바람이 불어왔다. 가을의 문턱에 추석도 가까워오고 있지만, 기억 속에 어머님의 추석은 찾을 수 없다.


변하는 세월 따라 삶도 변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가끔 떠오르는 어머님과의 추석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신의 세월이 되어서가 아닌가 하는 씁쓸함도 있다. 아름답고도 그리운 추석의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2024.08.29일 MBC 여성시대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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