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보내는 마음)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인천공항,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무사히 돌아왔다고. 전화를 하고 난 뒤끝은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전화를 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고.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세상천지에 여행 잘하고 돌아왔다고 전화할 곳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도 살기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를 자동차 뒷 좌석에 태우고 여행을 해 보고 싶었다.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이라도 가고 싶었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두고두고 한이 남아 있는 이유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화실로 향한다.
그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화실로 가는 것이다. 늙어가면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서다. 시작은 나도 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고 싶어 시작한 수채화다. 시험 삼아 해본 수채화가 늙어가면서 커다란 재산임을 알게 한다. 두어 시간을 숨도 쉬지 않고 열중하는 중, 옆에 있는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세상에 방해될까 한 번도 진동을 풀어 본 적이 없는 사람, 아들이다. 퇴근하고 있는 수원에 사는 아들이 전화를 한 것이다. 오늘도 생각, 전화할 아버지가 있어 아들은 참 좋겠다. 나는 전화할 부모가 없지 않은가?
아들이 전화를 해야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그렇게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다. 하지만 전화할 아버지가 있고, 전화를 받을 아들이 있음에 오늘도 살아볼 만하다. 밥을 먹고 화실에 갔으니 적어도 오후 8시는 넘는 시간이다. 아들은 이제야 퇴근을 하는 길이다. 무엇을 그렇게도 할 일이 많아 이제 퇴근한단다. 가슴이 찡해옴은 아비이기에 갖는 마음이리라. 어서 가서 푹 쉬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조심스레 운전을 하라는 뜻으로 얼른 전화를 끊는다. 아비의 생각은 참, 많다.
가정의 달, 5월이다. 부산에 사는 딸아이가 부산엘 오라 한다. 손녀가 합기도 시합을 하는데 같이 가자는 제안이다. 초등학생 합기도 대회, 엄청난 응원보단 아비가 한 번 오라는 딸아이의 배려다. 부지런히 짐을 싣고 달려가는 부산 길, 마음만은 가벼운데 봄비가 추적댄다. 운전이 불편하리라는 생각은 틀렸다. 신나는 운전이다. 300km에 가까운 거리를 달려가도 피곤함은 없다. 아이들을 만나, 하루를 보내려는 아비의 마음이다.
나는 왜 이런 배려를 하지 못했을까? 내 아버지는 일만 하도록 평생을 남겨 놓은 철부지다. 잠시의 쉼을 주는 여행길이라도 한번 하지 못한 철부지, 나만이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다.
아이들의 안내로 찾아 간 합기도 시합장은 열기가 후끈하다. 300km를 달려간 할아버지도 있으니 부근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고지식한 손녀는 사범이 시키는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감히 근처에 오지도 말라하며 눈길도 주지 않는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금메달을 두 개나 얻었다. 분야별, 학년별로 시합을 했기 때문이다. 신이 난 손녀와 가족들, 아이가 좋아함에 바랄 것이 없다. 아, 이렇게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겠구나! 금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걸고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손녀다. 모든 것이 해결된 부산행,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 모든 일이 끝나고 어떻게 할까를 망설인다. 사위의 안내로 맛있는 것을 먹고, 볼거리를 찾아 나섰다. 늘 장인, 장모를 살갑게 안내하는 사위다. 늘 고마울 뿐인 사위는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부산을 떠나 오는 날, 아침부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방안에 들어오길 바라 서다. 혹시 남아 있을 아비의 흔적이 아이들을 불쾌하게 할까 해서다. 썰렁하지만 상큼함을 한껏 담아 놓고, 화장실로 향한다. 세면대를 닦아 놓고 변기 청소를 한다. 혹시, 불쾌함이 남아 있을까 두려워서다. 아무 흔적도 없이 아내와 떠나 오기로 했지만, 딸아이가 따라나선다. 어느새 과일을 깎고 냉동된 음료수를 건넨다. 무한이 고마운 손길이다. 혹시 아비의 어깨가 축 늘어지진 않았을까? 아이가 서러워하면 어쩔까를 생각하며 씩씩하게 걷는다. 다시 딸만 남겨놓고 떠나와야 하는 부산이다. 얼른 아비가 가야 아이들도 편하게 쉴까 하는 마음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얼른 아내와 찾아가는 곳은 시원한 바닷가다.
부산엘 왔으니 바닷바람이라도 마시고 가야지. 썰렁한 바닷가에 바람만이 오고 간다. 가끔은 운동하는 사람도 보이지만, 왠지 서글픔도 함께하는 새벽이다. 뉘엿뉘엿 고희를 넘어가는 세월, 생각 없이 살아온 삶이 허전하기도 해서다. 큰 도움도 주지 못한 아이들은 아비를 어떻게 생각할까? 천만다행인 것은 손녀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화가라고 자랑한단다. 얼마나 다행이던가? 파스 냄새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화가라고 해 준다니. 세상에 이보다도 더 후한 손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얼른 차를 몰아 살고 있는 골짜기로 돌아오는 길, 신록의 계절 5월의 삶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