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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계절은 쉼이 없는 발걸음이었다.

(계절은 쉼이 없다)

by 바람마냥

계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내리는 빗줄기는 삶의 발길도 잡아 놓았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자전거를 타고 나선 것은 봄의 골짜기가 궁금해서다. 맑은 햇살이 내려온 골짜기엔 바람부터 달랐다. 맑음에 투명까지 묻어온 산바람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골짜기의 오후는 맑은 햇살마저 따갑다. 5월의 찬 공기와 달리 햇살은 따끈하다. 햇살과 함께 달리는 자전거 길에 만난 하늘 속 구름은 진객이다. 어떻게 저런 구름이 만들어졌을까? 구름 속을 유영하듯 도랑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는 신이 났다.


맑은 물소리가 청량해서다. 맑음에 낭랑함이 섞인 물소리에 숨이 멎었다. 골짜기의 아름다움에 신비함을 더해 준 것이다. 푸름이 깊어졌고, 색깔이 달라졌다. 생명이 숨 쉬는 도랑가의 삶은 여전했다.


자연은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골짜기를 달려가는 시냇물은 많은 식구들을 길러낸다. 봄이면 올챙이로 시작한 개구리다. 파랑도 있고 누런색을 칠한 개구리, 자연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주경계를 하며 먹이사냥 나온 백로가 평화스럽다. 냇가엔 가족과 함께 소풍 나온 식구들도 있다.


아스라이 헤엄치는 오리가족, 새끼 네 마리가 다복하다. 어미의 보호아래 새끼오리는 연신 물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무엇을 찾았는지 한가롭게 물 위를 오고 간다. 맑음이 주는 투명한 물속 물갈퀴는 잠시도 쉼이 없다. 편안한 쉼이 아닌 부지런한 발놀림이다. 냇가에는 많은 식구이 살아간다.


물고기의 삶이 있는가 하면, 중국에서나 봄직한 가마우지다. 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한 가마우지, 물속으로 숨어들더니 먼 물가에서 나타났다. 사냥에 성공했나 보다. 가마우지가 있음에 건강한 시냇물임을 알게 한다. 먹거리가 풍부하다는 뜻이리라. 곳곳엔 농부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산비탈엔 점푸름이 대세였다.

평화롭던 황소의 쟁기는 농기계가 대신한다. 거대한 트랙터로 논을 가는 농부들이다. 경운기도 지난날의 농기계가 되고, 웅장한 기계음이 변한 농촌을 보여준다. 논둑에 자동차가 서 있고, 거대한 농기계는 농촌을 보여준다. 길다린 비탈밭엔 어느새 푸름으로 가득하다.


트랙터가 오가며 배추가 심어졌고 고추가 서 있다. 어느 외국에서 온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이다. 어떻게 저런 손짓이 나올까? 오래전 사우디나 독일로 떠났던 산업역군들이 떠 오른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돈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 잠시도 쉴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한 뙈기를 완성하고 이동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벼농사와 밭농사로만 삶은 허전했나 보다. 곳곳에 세워진 비닐하우스에서도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모를 길러내고 꽃을 길러낸다. 묘목을 재배하기 위한 손길이 바쁘다. 허리굽은 어르신들이 씨앗을 놓고 있다. 멀리 떠난 자식들, 외로움도 잊고 용돈이라도 벌기 위한 어르신들이다.


머리에 얹은 허연 수건은 오래전 내 어머니다. 내려쬐는 햇살에 얼마나 따가울까? 오랜만에 나선 자전거길이 죄송하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는 근육이 깜짝 놀란다. 깊어가는 계절 따라, 먹이를 찾는 동물들이 바쁘듯이 사람의 손길도 쉼이 없다. 고단한 근육을 달래 가며 오르는 언덕, 오늘도 여지없는 맞바람이다.


바람을 맞으며 내려가는 내리막길, 오르막이 있었으니 당연히 길이어야 했다. 삶은 달랐음에 서럽지만, 계절은 쉼이 없이 달려가고 있다. 계절 따라 늙어가는 삶, 언제나 청춘일 줄 알았다. 자전거에 앉아 바라보는 고희의 삶엔 그리움과 서러움이 교차하고 있다.


골짜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제방 따라 있는 벚나무는 하얀 꽃을 달고 있었다. 축제가 열리고 사람들이 찾던 곳에 연초록이 순식간에 진초록이다. 순식간에 변한 색깔에 빗줄기가 떠오른다. 한 차례 빗줄기는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벚나무를 길러냈고 소나무를 또 변신시켰다.


송홧가루 날리던 외딴 봉우리, 낭만이 아닌 세월이다. 바람 따라 날아오는 송홧가루는 고마움이 아닌 원망이다. 자연의 넉넉함은 서러움이 되었다. 들판에 일렁이는 보리밭은 먹거리보단 보는 보리밭이다. 바람이 만들어 낸 푸른 들판, 잠시 페달을 쉼이 편안하다. 길가의 모습도 달라졌다.


애기똥풀이 노랑꽃을 피웠고, 잡초들이 가득한 길가엔 민들레 꽃이 지천이다. 오래전에 토끼먹이라 하여 찾기 힘들었던 민들레다. 민들레를 뒤로 하고 달려가는 시골길, 남은 영산홍이 지천이다. 엊그제 내린 빗줄기가 헤쳐 놓은 꽃은 아직도 싱싱하다. 덩달아 철쭉이 지천으로 피었으니 아름다운 시골길이다.


담장밑으로 꽃잔디, 그 위로 영산홍이다. 꽃으로 가득한 시골길이 달라진 삶의 모습이다. 말끔하게 단장된 울타리 밑으로 꽃잔치가 벌어졌고, 고즈넉한 시골집이 평화스럽다. 가끔 동네개가 짖어대면 암탉이 울어댄다. 싱거운 뻐꾸기가 뻐꾹 하며 울어대면 조용한 골짜기는 낮잠 속으로 젖어든다.


남은 근육의 힘을 빌려보는 자전거길은 아직도 맞바람이다. 삶은 언제쯤 이 바람을 떨쳐낼 수 있을까? 오랜만에 나선 자전거길, 계절의 변화 속에 만난 신비한 자연의 힘은 고희의 삶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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