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캐러 간다)
늦은 저녁에 전화벨이 울린다. 웬 전화일까? 은퇴를 하고 난 후의 전화기는 연중휴가 중이다. 전화를 하는 사람도 드물어 가끔 손녀와 주고받는 것이 전화기의 임무다. 늦은 저녁 반가운 누님이 하신 전화는 감자를 캐러 오라는 것이었다. 감자가 잘 됐다며 감자 캐는 날 전화한다 하셨는데 내일이 감자 캐는 날인가 보다. 감자를 캐러 수십 킬로를 달려간다.
신이 나서 달려가는 모습에 아내는 묵묵히 따라나선다. 밭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흐뭇한 표정 이어서다. 누님 내외는 전문적인 농사가 아닌 취미 삼아 짓는 농사다. 하지만 700여 평의 밭이니 보통 사람이 하기는 힘겨운 넓이다. 늘, 일을 조금만 하시라 하지만 끊임이 없다. 두 분은 취미 삼아 그리고 놀이 삼아 밭으로 향한다. 가끔 전화를 드리면 밭에 가셨단다.
김장철에 되면 다시 전화를 하신다. 총각무가 너무 많으니 총각김치를 해가라는 전화다. 아내와 준비를 해서 찾아간 누님네 밭, 벌써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동생 오기를 기다린다. 무와 파를 뽑아 다듬어 놓고, 여기에 쑥갓까지 길러 양념을 준비해 놓는다. 어렵게 농사지은 무를 씻고 버무려 오는 총각김치는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형님이 계실 때는 형님이 전화를 하시고, 누나도 전화를 하셨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전화할 곳은 누님밖에 없다. 비가 와도 전화를 하고, 눈이 와도 안부를 묻는다.
여든에 가까운 누님 내외에 고희를 넘기 동생이다. 언제나 애틋함에 전화를 주고받는다. 김장거리가 많다고 전화를 하고, 감자가 여물었다고 전화를 한다. 밭에 냉이가 수북하다고 전화를 하신다. 얼른 준비를 하고 찾아간 밭엔 먹거리가 가득이다. 떡이 있고 과일이 있으며, 간단한 술자리까지 준비되어 있다. 얼른 일을 끝내고 앉아 주고받는 술자리, 여기엔 그리움과 추억이 담겨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도 모든 가정사를 돌봤던 누님 내외다.
아버지가 편치 않으실 때도, 어머님이 아프실 때도 늘 누님의 몫이었다. 아무 불평 없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해 오신 누님내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집안의 부모 역할을 하신다. 몇 해 전 형님마저 돌아가신 후엔 가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누님이다. 애틋함에 그리움이 가득한 누님, 언제나 그간의 보살핌을 갚을 수 있을까? 늘 가슴에 쟁여 놓고 살아가지만 아직도 받기만 하는 철부지다. 기껏해야 식사 한 끼 사드리는 것으로 대신하지만 늘 가슴은 저려온다.
가정의 대소사를 도맡아 해 오시던 누님내외가 감자를 캐러 오란다. 오래전에 어머님이 하시던 전화를 누님이 하신 것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새벽에 출발한 밭엔 벌써 감자를 캐고 계신다. 놀러 온다는 생각으로 오라 하셨지만, 새벽에 출발을 했어도 벌써 일을 벌여 놓으셨다. 언제나 함박웃음으로 반겨주시는 누님 내외, 나는 무엇으로 그들에게 보답을 해야 할까? 감자박스에 들어있는 누님내외의 큰 사랑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다.
고희의 세월이 되었어도 아직 받기만 하는 세월, 언제 그 값을 갚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만, 마음만은 늘 가슴에 남아 있다. 언제나 누님에게 되뇐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누님이 잘 살고 계신다는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고단한 삶을 살아오신 누님, 누구보다도 베풀며 살아감이 많다는 것에 늘 감사한 세월이다. 누님 그리고 매형, 맛있는 감자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이 가을에 다시 김치 담그러 밭으로 가겠습니다. 고맙고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