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아저씨와의 소개팅에서 냉동난자까지, 나의 모태솔로 탈출 분투기
‘산 좋아하세요?’
‘아니오.’
주선자 김박사로부터 그가 산을 마치 산양처럼 잘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다음에 만나면 등산하고 내려와서 술 한잔 하면 어때요?’ 하고 애프터 신청 문자를 보냈다. 그는 좋다고 했다. 긴 명절 연휴가 끝나는 날 우리는 인왕산 입구에서 만났다. 막상 만나서 산을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단칼에 ‘아니요’라고 답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등산복을 입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럼 뭘 좋아하세요?’
‘집에 있는 거?’
오늘도 그에게서는 쿨워터 향이 났다. 저렇게 말을 하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숨 한 번 거칠어지지 않고 에스컬레이터 탄 것처럼 산을 스르르 오르는 그의 뒤를 따라 나는 공들여 한 화장을 무너뜨리며 열심히 따라 올랐다. 연휴라 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첫 만남에 술을 마시고 꽤나 가까워진 느낌이었는데, 맨 정신에 경건하게 산에 오르려니 조금 어색했다.
그도 어색했는지 갑자기 ‘인왕산에 지금 호랑이를 방사한다면 시민들 반응이 어떨 거 같으세요?’라고 질문을 했다. 말이 별로 없는 그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 웃어넘길 수도, 대충 답변할 수도 없었다. 마치 압박 면접장에 들어온 취준생처럼 나는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질문의 의도를 추측하며 원하는 답변의 방향을 구성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질문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면 배경인 조선 영조 시절, 궁에 호랑이가 들어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그 호랑이를 활로 쏴서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인 일화가 나옵니다. 그 일로 세손은 반대파로부터 호랑이도 쏠 수 있다면 용도 쏠 수 있지 않겠냐며, 타위가 반역이라고 억울하게 몰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호랑이를 쏘지 않았더라면 백성들을 지킬 수 없잖아요. 호랑이와 사람이 같이 살아가기는 어려우니까 아무래도 오늘날 서울 한복판에 호랑이 방사라는 것은...’ 흥에 취해서 떠들었지만 아무래도 소개팅 역시 산으로 가고 있었다.
상대는 술을 마시기 전에는 영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가 ‘제가 말이 너무 없죠.’라고 하길래 나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소개팅 애프터, 삼프터에서는 저 사람이 나와 잘 맞을지 인생관, 연애관 등을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데 나의 연애관이라는 것이 너무 미약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나는 취약하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인에 대한 기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 상대에게 나는 어떤 요구를 가질지, 나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주고 싶은지, 어떻게 만남을 지속하고 싶은지 잘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모태솔로답게 저런 상상만으로도 괜히 수줍어지기만 했고, 나이를 먹고 나서는 ‘내가 지금 사람 가릴 처지인가...’ 하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 나는 고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이런 나의 모순된 마음에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단 누구라도 만나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알겠다고 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말은 ‘일단 좋아하라’는게 아니고 ‘일단 만나보라’는 것이었는데, 나에게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며 상대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알아가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서로의 마음이 천천히 커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는 알지도 못하는데 나 혼자만의 마음이 끝 간 데 없이 커지고 마는 짝사랑 급발진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다. 한 친구는 소개팅을 동시에 여러 명과 해서 마음을 골고루 나누어 보라는 아주 산술적인 충고를 해주었다. 그 친구는 한동안 주말마다, 심지어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기 다른 사람과 소개팅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 원서를 100곳에 낼 정도로 뭐든 열심히 하는 친구는 결국 무수한 소개팅 속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하지만 인해전술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대신 일을 벌였다. 바쁜 프로젝트를 여러 개 진행하며 소개팅에 임하면 마음의 급발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리석었다. 나의 바쁜 일정 때문에 간신히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결국 세 번째 만난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코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우리는 총 다섯 번을 만났다. 다섯 번의 만남이 있고 나서 다음에 언제 보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더 이상 연락 안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 같아.’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동안 나는 마음의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후회했다. 내가 벌려놓은 모든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또 실패한 내가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