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내 호박죽에 야채죽을 섞었다.

-기특한 놈, 예뻐한 보람이 있구나.

by 코알라

"고모~ 미~워, 고모~ 싫~어~"

조카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친구와의 약속 시간을 조금 미뤘을 것인데, 지난 주말 동생네가 말도 없이 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고모랑 놀 생각에 함박웃음 지으며 대문 열고 들어 온 큰 조카는 내가 집에 없단 사실에 금세 시무룩해졌다고 한다. 보다 못한 엄마가 나에게 전화 걸어 주었고, 고모가 밉다고 말하는 조카의 목소리에선 말 그대로의 미움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무가 다음 주에 혜인이 집에 놀러 갈게. 약속~. 고모는 약속 지키는 거 알지?"

"응, 내 초코맛 사탕 고모 줄 거야."

꼭 쥔 양손의 열기로 사탕을 녹여버릴지언정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던 조카가 내뱉은 이 한마디만으로 나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목감기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다 한결 컨디션이 좋아진 목요일 아침이었다.

올케에게 연락해 오늘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언제든 환영이란다. 훗, 이들 가족에게 내가 이런 존재라니!

가는 길에 죽 집에 들러 한 동안 꽂혀있는 단호박죽과 올케와 조카가 먹을 소고기 야채죽을 샀다.

오후 4시, 유치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조카가 신발을 벗어던지며 애타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모~~~~"

청아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한껏 잠긴 듯한 목소리의 조카가 뛰어들어왔다. 감기에 걸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코에서 누런 콧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를 닮아서 인지(?) 계절 가리지 않고 감기에 자주 걸리는 조카를 보고 있자니 내가 아픈 것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몇 초간 응시하던 조카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그녀의 얼굴엔 곧 웃음이 만개했다.
무얼 하고 놀까 잠시 고민하다 불이 꺼진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아끼는 토끼인형을 들고 거실로 다시 나왔다.
지금 이 아이에게 감기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카는 올케에겐 완전히 등을 돌린 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오직 나와의 인형놀이에 빠져 들었다.

사실 인형놀이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들고 있어, 이리로 와, 이렇게 말해봐, 이렇게 대답해 봐. 인형 옷 입혀줘, 벗겨줘, 머리 묶어줘' 등 조카의 명령어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면 되었다.

아빠랑도 엄마랑도 할머니랑도 할 수 있는 인형놀이를 꼭 고모랑만 하려고 한다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다들 한 입 모아 이야기 하지만 정작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고모가 사 온 죽 먹자."

"싫어. 놀래."

평소 같으면 분명 배고플 시간인데 올케가 하는 말마다 싫다고만 하는 것을 보니 조카에게 싫어병이 온 듯했다. 순순히 먹으러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는 듯 올케는 감정의 흐트러짐 없이 종이 가방에서 죽을 꺼내 세팅하기 시작했다.


"고모 배고파, 우리 죽 먹고 다시 놀자 어때?"

"음.... 좋아!"

캬~ 엄마보다 고모의 말을 듣는 날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오늘만은 이 기분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다.




'내 거, 네 거.'가 확실한 조카는 자기 밥에 다른 사람의 숟가락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

조카도 자기 것이 있으면 절대 남의 것에 손대지 않는다.

무조건 자기 그릇이 있어야 하고 엄마나 아빠와 함께 한 그릇으로 나눠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아이다.


"고모 죽은 왜 노란색이야? 내 건 하얀색인데."

"고모는 호박죽이라서 호박색인 노란색이지~ 좀 줄까? 먹고 싶어?"

"아니."

노란색 죽이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하면서 남의 것이기에 욕심내지 않는 조카가 귀엽다.


"형님, 밑반찬도 같이 드세요. 여기 장조림 맛있잖아요."

"장조림 맛있지~ 그런데 호박죽에는 안 어울리더라, 야채죽엔 잘 어울리지? 많이 먹어 난 괜찮아."

"하긴 호박죽에는 밑반찬이 안 어울리긴 하네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카가 장조림을 쳐다보더니 내 죽 그릇에 시선이 멈췄다.


"고모 죽에는 안 어울려?"

조카가 물었다.

"응, 호박죽이 달아서 짭쪼롬한 장조림이랑 같이 먹는 건 고모 입에 안 맞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단어를 써서 설명해야겠다는 생각과 다르게 아이가 이해하기 힘든 '짭쪼롬'이라는 사투리를 써버려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그럼 내 야채죽이랑 먹어봐, 맛있어."


갑자기 숟가락으로 내 호박죽에 본인의 야채죽을 덜어 놓기 시작했다.

노랗기만 하던 호박죽에 하얀색 쌀을 베이스로 한 야채죽이 뒤섞이며 희한한 색을 만들어 냈다.

순간 멈칫했지만 바삐 숟가락을 움직이며 스스로를 뿌듯해하는 조카를 말릴 수는 없었다.


"어머, 너 고모 죽에 왜 그걸 섞어~ 그만해~"

올케가 먹다가 놀라 조카를 말렸다.

"고모 장조림 먹으라고. 장조림은 야채죽이랑 먹어야 맛있어."

말리던 올케가 조카의 한마디에 멈칫했다.


"고마워~ 음~ 혜인이가 섞어주니까 더 맛있다!"

내가 맛있다며 짓는 웃음 따라 조카도 웃고 있었다.

'이런 순간이 앞으로 나에게 얼마나 더 있을까?', 요즘 들어 자주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안다.

조카 아무리 예뻐해 봤자 다 지들 부모가 먼저지 고모가 먼저겠냐며 그 돈으로 네 옷이나 사 입고 그 시간에 연애라도 더 하라는 친구들의 뼈 있는 조언이 맞는 말임을 나도 안다.

나 또한 막내 이모가 어릴 적 나를 엄청 예뻐해 주었지만 결국엔 우리 엄마가 최고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조카가 나를 저렇게까지 그리워하고 좋아해 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조언들 이과 경험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정도로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은 곧 지나갈 것이고 이 아이도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랑 노느라 더 이상 고모랑 놀아주지도 않을 테니 내가 1순위일 때 실컷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해보자 싶다.


늦은 저녁 집에 가려는 나를 붙잡고 조카가 떨어지지 않았다.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다 놀아서 그런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눈은 이미 졸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음에도 고모와 더 놀고 싶다 매달렸다.


"고모가 다음 주 목요일에 또 올게, 고모 약속 지키는 거 알지?"

결국엔 다음 주 약속을 해버렸다.

그제야 생떼가 멈추고 잡고 있던 나의 손도 놓아주었다.

저 녀석 아무래도 고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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