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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May 04. 2023

마흔, 와플을 구워보기로 했습니다.

-프롤로그. 정규직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이번 주 내로 면접결과 알려준대. 떨어지면 아르바이트하러 갈게."

 끝까지 미루고 미루던 아르바이트였다.

 무엇이든 도전해 보다 어느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나아갈 길을 찾지 못했을 때 막차 타는 심정으로 올라탈 생각이었던, 안전빵과도 같은 남동생이 운영하는 와플가게 아르바이트.




 내가 전형적인 문과 감성의 소유자라면, 이윤과 실리를 따지는 이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남동생은 생김새도 성격도 모든 것이 나와 정반대이다.


 주말부부라 주말마다 대구 집으로 내려와 토끼 같은 자식들과 놀아주기도 바쁠 텐데 부지런히 시간을 쪼개어 가게 자리를 알아보더니 3년 전 첫 와플가게를 개업했고, 작년 8월 두 번째 와플가게를 개업했다.

 요즘 잘 나가는 사업템은 무엇인지 쉬지 않고 알아보고 있을 근로자이면서 사업주이기도 한 동생은 여전히 돈에 배고프다.


 동생은 나의 사직서가 승인 나기 전부터 믿을 건 가족뿐이라며 육아로 바쁜 올케 대신 나에게 와플가게의 전반적인 업무를 맡기고 싶어 했다. 번아웃으로 무기력감이 절정이었던 때라 회사를 그만두면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만 싶다는 말로 몇 번을 거절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와플가게 아르바이트를 권유했다.


 "돈도 벌고, 하다가 재밌으면 누나도 와플가게 하나 차리면 되잖아. 언제까지 노예로 살래?"

 "노예로 살든 말든 냅 둬!! 내가 니 인생 들러리 하려고 회사 그만둔 줄 알아?"

 틈만 보이면 일 시키려는 동생이 귀찮고 짜증 나 바로 후회할 모진 말을 내뱉은 뒤로 남동생의 스카우트 제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5년 전, 직장 동료가 자주 가는 절에 함께 사주 보러 간 적이 있다.

 나이 지긋한 스님이 내 얼굴을 스윽 보시곤 "심성은 착하네, 장사할 생각 하지도마. 다 퍼 주는데 뭔 이윤이 남아. 정~ 장사가 하고 싶으면 50세 넘어서 해."라고 했다.

 그 뒤로 스님의 말을 좌우명 삼아 돈 벌며 사람구실 하고 살려면 '노예'가 적당하겠다 생각했다.

 회사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 온 가족 모두 퇴사 후의 삶을 응원하며 이직할 생각 하지도 말고 동생처럼 '사장'이 되어보라 권했지만, 나는 "장사가 쉬워? 신경 쓸 게 더 많아."라는 말로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차단했다.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원래 겁도 많은 나지만, 갈기갈기 찢겨 마음속 상처투성이인 지금의 상태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게 겁의 수준을 넘어서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몇 번의 면접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출근하라는 식으로 좋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정작 최종합격 여부 통보를 해주기로 한 날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생각보다 별로인가?' 싶어 상처되었지만 점차 불합격에 적응되어 갔다.

 채용사이트에서 구인공고를 검색하는 것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고, 조건이 맞다 싶으면 기계적으로 입사 지원 버튼을 눌러댔다.


 통장 잔고의 단위가 한 자리 줄어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 내 돈을 빼간 게 아닌가 싶어 체크카드와 신용카드 이용 내역을 확인해 보았는데 전부 내가 쓴 것이 맞다.

 재벌집 막내딸처럼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살 았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일까?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지출을 어떻게 줄여볼까' 생각이 많아질 무렵 뜸했던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누나! 목요일, 금요일 이틀만 아르바이트할래? 하루 4시간. 어때?

 내 마음에 CCTV를 달아놓은 것인가?

 그나저나 이 자식 참 속도 좋다. 나 같으면 더러워서라도 다신 꺼내지 않을 제안을 포기 않고 또 꺼낸다.


 평소 대화에 인색해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생이긴 하지만 나를 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 또한 뚜렷한 이유 없이 더 이상 거절만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내 통장의 잔고를 위해서라도 소득 없는 상태로 면접만 보러 다닐 순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번에도 불합격이면 와플가게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 떨어지면 미련 없이 구직활동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면접이 끝난 후 헐레벌떡 면접장을 뛰어나와 가방을 울러 매고 복도를 지나가던 나를 붙잡고 당장 출근 가능하냐고 물으시던 면접관 중 한 명이었던 전무님의 태도와는 반대로 또 '불합격' 통보를 문자로 전달받았다.




 -보건증 없지? 일단 오늘 빨리 가서 보건증부터 만들고, 다음 주에 일 배우러 가게로 와.

 -어.

 -아르바이트하기 싫어?

 -싫으면 안 해도 되냐?

 -안되지.

 

 면접 떨어진 화풀이로 괜히 동생에게 투덜댔다.

 

 회사를 그만두기 마음먹은 순간부터 남동생은 늘 말했다, 언제든 아르바이트하러 오라고.

 그 '언제든'이라는 말에 나보단 동생이 더 나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내가 말만 하면 할 수 있는 단순하고 쉬운 일이라 가벼이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좀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어느 곳이든 또라이는 존재하기 마련인데, 회사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직장동료 100명 중 소문난 또라이 몇 명의 예측되는 몇 가지 행동들만 조심하면 되지만 자영업은 정해진 범위가 없지 않은가?

 언제 어디서 얼마만큼의 위력을 가진 또라이를 만날지 모르니 늘 조심해야 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도 능청스럽게 잘 대응해야 한다.


 역시 자영업도 '사람'이 가장 큰 변수다.
나를 힘들게 할 수도, 기쁘게 할 수도, 보람차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



 -내가 사장인데! 그런 일 있음 나한테 바로 연락해!

 -바로 연락해도 그 또라이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은 나 혼자잖아.

 -괜찮아. 별 거 아냐. 뭐 그런 걸 벌써부터 겁내냐?

 -안 해 본 일이니까! 겁이 나! 겁이 난다고!!

 -시급은 9620원인 거 알지?


 나의 걱정과 징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남동생의 멘털을 배워야 한다.


 다음 주 수요일, 15살 어린 매니저에게 와플 굽는 법을 배우러 가기로 했다.

 기고 들어가야 할 땐 기똥차게 알아채는 타고난 눈치력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을 매니저님께 깍듯이 존대하며 열심히 배워보기로 다짐했다.


 마흔, 정규직에서 아르바이트 생이 되어 일생일대의 첫 와플을 구워볼 예정이다. 떨린다.

 회사 출근 전 속으로 읊조리던 다짐을 오랜만에 해본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오늘도 무사히...'


 

고작 주 2회 아르바이트인데 나 지금 너무 거창한 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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