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알라 May 14. 2023

와플을 잘 구우려면 일기예보를 확인하세요.

-세심한 맞춤이 필요한 건 와플이나 사람이나 똑같다.

분명 5월 5일 어린이날인데 여름 장마기간에야 볼 수 있는 장대비가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올케 말로는 전국적으로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어린이날은 8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햇빛 쨍한 날보다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긴 청바지를 입고 20분 이상 걸어야 하는 출근길의 비는 썩 반갑지가 않다. 


조심조심 걸어도 운동화와 청바지가 금방 젖어버렸다. 

정성껏 헤어롤로 말아서 적당한 볼륨을 만들어 놓았던 앞머리는 볼륨을 잃어버린 채 중구난방으로 뻗쳐졌다.

건물 유리창에 비치는 만신창이가 된 나의 볼품은 마음속 파이팅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영업 30분 전인 오전 9시 30분에 와플 가게에 도착했다.

경비 해제를 누르고 출입키를 단말기에 대자 문이 열렸다.

가게 안 뜨거운 공기가 내 얼굴을 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환기시키기 위해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빗 속에서 빠져나와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굵은 빗줄기와 일정한 빗소리를 온전히 아름답게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주문을 받는 것에 미숙한 교육생 신분이라 점장님이 오기 전까진 키오스크와 카운터 단말기를 켜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왜 30분 일찍 출근했느냐?

와플 기계 예열, 생크림과 와플 반죽 만들기, 딸기 손질 등과 같은 영업 전 재료 준비를 혼자 해보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에 적어 둔 메모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순서에 맞게 영업 준비를 시작했다.

설명 들을 때는 '쉬운데?'라는 생각에 간략하게 메모해 놓고 왜 혼자 하게 되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간단한 것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

늘 느끼는 것이지만 새로운 일에 능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이든 세심한 메모와 노력의 시간이 필요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차가 막혀 조금 늦는다는 점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영업시간을 10시로 알고 있을 고객들을 생각하니 키오스크와 카운터 단말기를 켜지 않을 수 없었다.

비 오는 공휴일이라 매장 손님보다 배달 주문이 맞을 것으로 예상되어 전원 스위치를 켜기 전 배달 주문 처리 방법에 대해 다시 한번 연습해 본 뒤 전원 'ON'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하나의 와플을 만들어 손님에게 판매하기까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꽤 많다.


일단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능선 모양으로 깨끗하게 생크림을 와플에 발려야 한다.

오른손바닥 전체로 와플빵이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어 고정한 후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서서히 생크림을 밀어내며 바른다. 바깥으로 밀려난 생크림들은 패스츌러를 세워 와플 끝 면을 긁고 지나가며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생크림의 발림에 지저분한 느낌이 들진 않는지 양은 적당한지 확인 후 토핑을 얹는다.

이 모든 과정은 단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예술품 만들듯 심사숙고하며 생크림을 바르면 와플빵이 눅눅해져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능선모양의 생크림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만들었던 몇 개의 와플빵이 눅눅해지는 바람에 판매되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이력이 있다.


토핑으로 얹히는 딸기도 정해진 개수만큼 내 마음대로 올리는 것이 아니다.

딸기의 두께는 너무 굵지도, 얇지도 않게 개당 4~5개의 조각이 나와야 하며 신선하고 깨끗한 부위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딸기가 최대한 와플빵 바깥쪽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동일한 방향으로 생크림 위에 잘 얹혀야 하고 완성되면 이탈하는 딸기조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히 와플빵을 반으로 잘 접어 봉투에 담는다.


누텔라나 밀크 크림 등은 많이 바른다고 좋은 게 아니다. 일정 양을 초과하면 너무 달다.

와플의 네모난 조각들 사이사이만 채우는 정도가 딱이다.

이것도 '네모 조각 채워야 한다'라는 고집으로 패스츌러를 움직이다 보면 '예술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또 와플빵이 눅눅해져 판매되지 못하고 폐기되고 만다.




10시 40분이 지나도 다행히(?) 주문은 들어오지 않았다.

웬만한 재료 준비가 끝난 터라 연습 삼아 와플빵 몇 개를 구워 생크림 바르는 연습을 해보았다.

가장 큰 난관은 작은 손때문에 생크림을 바르는 동안 와플빵을 지탱하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몇 번의 연습을 하다 보니 사촌동생인 점장님이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에어컨 안 틀었네?"

"어 안 더운데?"

"아니, 누나 더운 건 상관없고 와플빵."

"와플빵이 왜?"

"오늘 비 오고 습하잖아. 그럼 빵도 눅눅하다고. 이것 봐. 눅눅하네."

오자마자 연습해 보려고 갓 구워둔 몇 개의 와플빵을 만져보고는 눅눅하다며 잔소리를 늘여놓았다.


"그리고 3분 보다 조금 더 구워야겠는데? 날씨가 습해서 평소 굽는 시간보다 더 구워야 할 것 같아."

평소 와플빵 굽는 시간은 3분인데 비가 와 습한 날씨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구워야 할 것 같다는 점장님의 진단이 나왔다.

"이것 봐, 이제 딱 먹기 좋은 와플빵 색깔이 나오잖아 그렇지?"

 3분마다 울리는 타임기 알람 소리를 무시하고 몇 초의 시간을 더 들였다 뚜껑을 여니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의 와플빵이 완성되어 있었다.


"아직 주문 들어온 건 없었지?"

"어, 없었어."

"다행이다. 눅눅하다고 컴플레인받을 뻔했네."


'꼭 그렇게 마지막 말을 해야 속이 시원했냐! 모를 수도 있지!'

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빗소리와 빗줄기를 감상할 줄만 알았지 와플빵에 미칠 영향은 생각지 않은 나의 아마추어 같은 행동을 인정하며 "그러네, 다행이네."로 대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11시부터 배달주문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점장인 사촌동생은 많이 만들어봐야 손에 익는다며 최소한의 도움만 줄 뿐, 와플을 만들어 포장한 완성품을 배달 기사님께 전달하는 일까지 모두 나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나 커피 샷 다 내렸으면 이걸 빼...ㅅ.."

"알아 안다고!!"

안경렌즈에 튄 와플반죽을 닦을 겨를도 없이 정해진 배달시간에 맞춰 주문을 쳐내는 것도 미춰버릴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잔소리하기 바쁜 점장님께 그만 정색을 내지르고 말았다.




퇴근 시간이 되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정말 하얗게 불태운 날이다.

방근 출근한 매니저에게 점장님이 오늘 날씨가 눅눅해 와플빵 굽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며 열심히 설명 중이다. 추우면 카디건을 걸치되 에어컨은 절대 끄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하고 있다.


그래 맞다.

가장 중요한 건 와플빵이다. 

'빵이 맛있어야 한다는 걸 빵순이인 내가 왜 간과하고 있었지?'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생크림을 바르고 예쁘게 토핑을 얹힐지보다 기본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비자라도 와플빵에 발린 생크림의 모양보다 와플빵의 굽기와 바삭함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 뒤로 출근 전 날씨와 습도를 확인하기 위해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려면 상대방의 기분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을 달리하는 정도의 센스가 필요하지 않은가?


와플도 인간관계도 세심한 맞춤 정도의 '매너'는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와플을 구워보기로 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