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믿을 뿐.
"뭔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다.
동글동글한 생김새부터 불 같은 성격까지 똑 닮은 우리 모녀지만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상처를 대하는 방법'이다.
상처받았거나 속상한 일이 생겼거나, 어이없어 화나는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재잘재잘 엄마에게 다 이야기하고 보는 나와 달리 엄마는 속상한 일이 생겨도 티 내지 않다가 '시간을 통한 상처 회복'이 완료된 다음에야 "이런 일이 있었다?!"라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특히 장민호 가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기본 표정으로 깔고 있던 엄마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미간이 찌부러져 있다니! 무언가 큰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큰 이모가 일을 그만뒀대. 매니저랑 좀 안 맞았나 봐.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만뒀다네. 아휴 참..."
"이모도 충동적으로 결정한 건 아닐 거 아냐? 매니저랑 얼마나 안 맞길래..."
"몇 달을 고민했다네, 이제 나이도 있는데 다시 어떻게 직장을 구하려고... 걱정이네 걱정이야."
엄마는 육 남매 중 둘째로 올해 65세가 되었고, 큰 이모는 엄마와 2살 차이로 올해 67세가 되었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임을 누구보다 경험한 나이기에 큰 이모의 퇴사가 이해되고 공감되었지만, 엄마가 큰 이모의 나이를 말하는 순간 나도 큰 이모의 재취직이 걱정되긴 했다.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걱정이다. 걱정이야."
"요즘 70세에도 일하시는 분 많아. 기회만 좋으면 재취직 잘 될 수 있을 거야. 이모 경력 많잖아?"
"그래도 누가 늙은 사람 쓰려고 하겠니? 젊은 사람 쓰려고 하지... 일하려는 사람 천지인데."
큰 이모에게도 몇 번의 백수 시절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쉽게 재취직이 되었던 예전을 생각하며 너무 걱정 말라며 엄마를 다독였지만, 그 뒤로도 큰 이모에 대한 엄마의 걱정은 이어졌다.
밥을 먹으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다 결국 또 '큰 이모의 재취직에 대한 염려'로 엄마가 대화의 화제를 돌린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에는 1년째 놀고 있는 백수가 있는데, 왜 백수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큰 이모 걱정만 그렇게 하냐며, 큰 이모보다는 경력 단절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내 걱정이 더 되어야 하지 않냐며 엄마에게 물었다.
"왜 걱정이 안 되겠느냐.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그래 너 한 번 말 잘 꺼냈다. 언제 취직할 거냐? 할 생각은 있는 거냐?", 내가 건넨 질문에 대답은커녕 오히려 폭탄 질문세례를 받게 될까 봐 최대한 들어내지 않던 속마음이었는데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엥? 생각지 못한 대답에 놀라 다시 물었다.
"걱정이 안 된다고? 왜? 왜 걱정이 안 되는데?"
생각지 못한 엄마의 과분한 믿음에 감동이 밀려오고, 울대에선 미세한 진동이 일렁거렸다.
퇴사하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낮에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 내가 외할머니의 손녀임을, 내가 엄마의 딸임을 알고 있는 동네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괜히 움츠러들었던 적이 있었다.
왜 맨날 늦게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냐며 늦은 귀가를 걱정하던 엄마는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일찍 일찍 다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난 너 걱정 하나도 안된다."라고 했다.
그때는 걱정이 하나도 되지 않을리 없을 엄마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엄마는 왜 내 걱정을 안 해?"
"내가 네 걱정을 왜 안 해?"
걱정이 안 된다고 해서 왜 걱정을 안 하냐고 물었는데, 왜 내가 네 걱정을 안 하냐고 되묻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나 면접은 자꾸 떨어지고 이렇게 집에서 글 쓰고 취미 생활 하고 있는 거 걱정 안 된다며~ 1년이나 지났는데 왜 걱정이 안 되냐고~"
"아~ 그 걱정? 넌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하는 아이니까. 잘할 거니까 걱정 안 하는 거지"
요즘 남동생이 조카에게 자주 하는 말이 "아빠는 아빠딸 믿어!"이다.
부모의 믿음은 자식에게 자신감과 자립심을 만들어 준다나 어쩐다나.
평소답지 않게 오글거리는 말을 딸한테는 잘도 한다며 동생을 놀렸었는데, 이미 성격과 성향이 다 형성되고도 남을 나이가 된 마흔의 나도 엄마의 무한한 믿음에 자신감이 꿈틀댄다.
엄마의 염려와 달리 큰 이모는 퇴사 후 한 달 뒤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열심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여전히 내 걱정은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