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조조영화를 즐긴다.
고 2 때 앞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는
곱슬머리에 손에는 습진이 걸려있고
자주 아파 결석도 잦았던 아이였다.
그 친구는 늘 일본 수입 잡지를 들고 다녔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본 배우와 아이돌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그 친구가 들려주는 일본 연예계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다.
"이 잡지? 한... 2만 원? 잘 모르겠어."
가격조차 확실히 모르는 수입 잡지를 몇 권이나 갖고 있던 친구
일주일 용돈이 만원이었던 나는 들키지 않게 속으로 놀랬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그 친구는 알고 있었다.
반 친구들에게 전날의 드라마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는 걸 즐기던 내가
어느새 그 친구에게 일본 드라마 줄거리를 듣는 게 더 즐거워졌다.
"영화 보러 갈래?"
"그래 좋아! 그럼 아침 일찍 보자. 조조로 봐야 좀 싸거든."
"조조? 영화를 왜 싸게 봐야 해?"
다른 친구들과는 조조영화가 당연했는데,
생각지 못한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제 값 주고 보면 안 돼? 아침 일찍은 일어나기 힘든데..."
어린 나이에 자존심이 상했다.
용돈을 다 써버려 빈털터리란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나인데,
이 친구에게만큼은 돈 없는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넌 한 달 용돈 얼마야?"
"용돈? 난 용돈 안 받는데? 통장에서 쓰고 싶을 때 인출해서 써."
인출이라...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도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 본 적이 없었다.
"통장엔 늘 돈이 있어?"
"어, 그렇던데? 지금도... 한 2백만 원 정도 있어."
통장잔고를 들으니 조조영화를 본 적 없다던 그 친구가 이해되었다.
"구질구질하다야.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화를 봐야 해?"
나의 조조영화가 구질구질해져 버렸다.
나의 모든 일상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잘 나가는 학원의 수학강사라 했다.
돈에 구애를 받으며 살아본 적이 없다 했다.
넉넉했지 모자랐던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했다.
그 친구 앞에선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 친구와의 약속을 피하기 시작했다.
학년이 바뀌고 자연스레 그 친구와 멀어졌다.
얼마 전, 우연히 버스 안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여전히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띠를 한 그 친구를
나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본 속도와 달리,
선뜻 몸이 움직여지진 않았다.
한참이나 버스 안에 함께 있었지만 결국 인사를 건네진 못했다.
내가 조금 더 어른이었을 때,
이 친구를 만났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땠을까?
여전히 나는 움츠러들기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