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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Jul 17. 2023

출근길에 만난 외할머니가 나에게 소리쳤다.

-사소하고 익숙한 것들이 주는 인사.

지난주 토요일 밤 11시,

전 남자 친구의 "자니?" 보다 더 무서운 동생의 "뭐 해?"라는 카톡은 늘 날 시험에 들게 한다.

'씹을까?'


 남동생이 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어떤 이유로 어딜 가야 해서 애들을 봐달라거나 직원 누군가의 공백으로 와플 가게 추가 근무를 요청한다거나.

주말부부인 동생네가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은 백 번 이해하지만, 정말 가끔은 모른 척하고 싶다.

 

 더군다나 지난주 토요일은 첫째 조카가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5일 입원하게 되어, 9개월 된 둘째 조카를 오롯이 혼자 돌보느라 이미 녹초가 되어 있던 상태였다.

 막 집에 돌아와 목욕재계 후 이제야 느긋하고 여유롭게 쉬나 했더니 또 이렇게 카톡이 왔다.


 "집으로 돌아온 지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얜 또 왜 이래!"

 카톡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짜증부터 났다.


6월에 입사한 22살의 매니저가 갑자기 그만뒀다며 다음 주 일주일 내내 오픈 시간대 근무가 가능한지 묻는 카톡이었다.

 월화는 병원 예약을 해 둔 상태라 불가능하고, 수요일만 추가로 근무가 가능하다 답했다.


그럼 그다음 주는? 평일 내내 오픈 근무 가능?

이런 놈이다, 하나를 내어주면 하나를 더 요구하는.

 그다음 주도 월화는 안 돼, 약속 있어.
그럼 그다음 주도 수요일 추가 근무 부탁.


이렇게 대화를 끝내면 되는데 난 또 일을 만든다.

매니저 한 명이 빠진 자리를 혼자 땜빵하고 있을 성실한 점장이 눈에 밝혔기 때문이다.

 병원 앱에 들어가 예약일자 변경이 가능한 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화요일 12시 20분 딱 한자리 예약이 가능해, 얼른 취소하고 화요일로 진료예약일을 변경했다.

 

월요일 예약한 내과 병원진료 화요일로 바꿨어.
화요일은 오후에 치과도 가야 해서 아예 안되고, 담주는 월, 수요일 추가 가능


 고마워

 결혼하고 철이 든 건지 삼십 평생 하지 않던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동생이다.





"택배 왔지?"


"안 왔는데?"


"이상하다. 새벽 5시 30분에 배송 완료라고 문자 왔는데."


"1층 외할머니 집에 가 있는  거 아냐? 엄마가 가볼게."

 아침에 방울토마토를 먹으려고 잠들기 전 쿠팡으로 주문해 놓은 방울토마토의 행방이 묘연했다.


"1층 외할머니 집에 와 있더라. 할머닌 벌써 일 갔나 보네. 대문이 꽉 잠겨있네."


"이렇게 일찍? 출근이 몇 시인데?"


"7시일 걸?"


외할머니는 공공근로를 하고 계신다.

엄마와 이모들이 힘드니 하시지 마라고 몇 번 얘기했었지만, 이거라도 안 하면 하루가 너무 무료하고 다며 오히려 즐겁다고 하셨다.

그러시곤 '돈 버는 것'에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 더 이상 말리지 마라는 으름장을 놓으셨다.

 돈 벌 때는 몰랐는데, 돈 벌지 않고 1년을 지내보니 외할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와닿는다.


 오늘 와플가게에서 먹을 방울토마토 20개를 깨끗이 씻어 봉투에 담고, "간대이!!" 라며 동네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인사하고 대문을 나섰다.


 비가 오다 말다 하더니 나오자마자 보슬비가 내렸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 5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연두색 조끼 입은 할머니 두 분이 비를 피해 상가 건물 지붕 아래 나란히 앉아계셨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동글동글 얼굴의 저 할머니를 어디서 봤더라... 앗! 외할머니다!!!!



"할머니!!"


"어?"

 이른 시간에 네가 웬일이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셨다.


"와플 가게 가요. 일하러요."


"아~ 오늘 가는 날이야?"


"네."

외할머니에겐 불필요한 정보들이라 생각해 그냥 출근 날이라 말했다.


 "할머니 비 와서 잠시 쉬고 계신 거예요?"


 "어, 그래."


 "저 이제 가볼게요."


 "그래 그래."

 외할머니 옆에서 나를 보며 덩달아 웃고 계신 동료 할머니에게도 인사한 뒤, 뒤돌아 가던 길을 다시 갔다.

 세네 발짝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우렁찬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갔다 와!"


상가건물 맞은편 아파트의 주민들에게도 들리고도 남았을 우렁찬 외할머니의 목소리에 고요했던 골목에 잠시 활기가 스쳐 지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뒤돌아 외할머니를 쳐다보며 대답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울컥함에 울대가 묵직해진 나는 감정을 들킬까 봐 앞으로 걸어나가며 "네!"라고 대답했다.


어느 부분에서 울컥했는 것인지, 도대체 "잘 갔다 와!"라는 말이 왜 슬프지만 따뜻하게 들린 것인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멀어져 가는 내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을 외할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터졌다.


엄마가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인다고 길에서 질질 짜고 다니지 마라 했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길에서 질질 짜버렸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독서를 시작해보자 싶어 요즘 책을 들고 다닌다.


오늘 들고 온 책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이다. 

'그르게, 왜 힘들면 안 될까?'라는 궁금증에 서점에 갔다가 제목만 보고 바로 구입한 책이다.

 

 오늘 지하철 안엔 빈자리가 꽤 있어서 앉고 싶은 자리를 골라 앉는 호강을 누렸다.

'책 읽을 때 듣는 음악'을 플레이한 뒤 책을 펼쳤다.

어제 살짝 감기 기운이 있어 약 먹고 많이 자서 그런지 몇 줄 읽어도 노곤해진다거나 눈이 따갑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내릴 때까지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장을 넘기고 넘기다 한동안 내 눈을 멈춰 세운 이 문구가, 내가 '외할머니의 평범한 인사'에 울컥했던 이유를 알려주는 듯했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 위로를 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 고통받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책 내용 중에서

 


 많은 위로가 담긴 외할머니의 "잘 갔다 와."라는 인사.

 그 위로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똑똑한 손녀딸인 나.^^


 오늘은 아무리 바빠도 다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와라! 단체 주문아! 내가 다 해치워주마! 움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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