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고모가 흔하진 않지.

-조카에게 고모는 나 하나.

by 코알라

감기로 고생하다 낫자마자 조카가 감기에 걸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연차를 다 쓴 올케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동생을 대신해 우리 집 감자인 내가 올케의 퇴근시간 전까지 아픈 조카를 보살피기로 했다.

이른 아침, 곧 둘째 출산 예정인 올케가 무거운 몸으로 조카의 소지품과 장난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우리 집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 버선발로 마중을 나갔다.

아파서 그런 것인지 유독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조카와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고 일터로 나가는 3살 어린 올케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동안 조카는 '고모'라는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다. 꽁, 엄모, 까이... 등등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아무도 모를 부정확한 발음을 내뱉고 난 뒤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나를 부르는 것이라 어림짐작 할 뿐이었다. 간혹 나를 '이모' 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동생과 올케는 혹여 내가 서운할까 봐 '고모라고 해야지' 라며 조카의 입에서 '고모'라는 단어가 나오도록 열심히 유도했다. 하긴 조카의 주변엔 친이모뿐 만이 아니라 수많은 엄마의 친구들을 '이모'라 부를 테니 '고모'는 당연히 생소할 것이다. 나도 내 친구들의 아이들에게 '이모' 라 불리고 있으니...


한두 번 '이모'라 불릴 땐 서운하지 않았는데, 횟수가 잦아지자 조카가 나중에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나와 함께 했던 모든 추억을 '이모'와 함께한 추억으로 오해할까 봐 염려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연스레 조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엔 쭈뼛쭈뼛 엄마 따라가겠다며 출근하려는 올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떨어지지 않으려 하더니 이제는 갖고 온 장난감을 자랑하고자 풀어헤치는데 정신이 팔려 올케가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떼어놓고 출근하는 올케도, 조카의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되는 나도 한결 수월해지긴 했지만, 1분 1초를 허투루 쓰지 않고 놀이를 이어가는 조카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한 나는 그녀의 니즈(Needs)를 끝까지 맞춰주지는 못한다.


시간이 약 이랬던 가... 이렇게 저렇게 평범한 일상을 조카와 몇 번 보내고 나니 조카는 더 이상 나를 '이모'와 헷갈려하지 않는다.

"고모"

너무나 또렷이 나를 부른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이야기할 때에도 호칭을 헷갈려하지 않고 '고모'라 부른다 한다. 뿌듯함과 희열이 공존했다.


내가 엄마를 '엄마'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고 사소한 것이었는데, 정확하게 '고모'라 불리게 되니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정확해진 발음만큼 조카가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엄마를 엄마라 불러주었을 때, 아빠를 아빠라 불러주었을 때,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불러주었을 때, 할머니를 할머니라 불러주었을 때, 이모를 이모라 불러주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뻤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호칭하는 것은 단순한 부름의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 나와 어떤 추억이 쌓여 내가 그렇게 그를 부르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정확히 그 사람을 인지해야 부를 수 있는 것이 호칭이다.

날 보며 울지만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리도 컸는지 새삼 감개무량해져 자고 있는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프니 잠만 잘 것이라는 동생의 말과 반대로 조카는 30분 자고 일어나더니 내내 쉬지 않고 인형놀이와 미용실 놀이를 하자했다. 잘 놀아주면 '고모 제일 좋아' 라며 활짝 웃어주었다가 잠시 휴대폰이라도 보고 있으면 '고모 제일 싫어' 라며 한가득 삐진 얼굴로 나와 거리를 두고 문지방에 서서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잘 놀고 간 그날 저녁 열이 더 심해져 병원에 다녀왔다한다. 올케는 고모가 재밌게 놀아줘서 아픈 줄도 몰랐던 것 같다며 고마워했고, 집에만 가면 열이 나는 조카는 하루만 봐달라던 애초의 약속과 다르게 3일 동안 유치원을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실컷 미용실 놀이를 했다.

3일 연속 딸을 맡겨 미안해하는 동생에겐 그렇게 미안하면 용돈이나 달라며 농담 같은 진담을 던졌다. 알겠다며 용돈을 입금해주겠다는 동생의 말에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진심을 담아 미용실 손님 역을 해내 보기로 했다.


DHKS.png 조카의 네일샵



P.S '감기 안 옮게 조심해, 우리 딸내미 감기 옮으면 되게 독해' 라던 동생의 말을 무심히 흘러 넘겼는데, 나는 지금 조카에게 감기가 옮아 4일째 고생 중이다. 3일 치 처방약의 마지막 날인 오늘, 부디 내일 다시 처방약을 받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잘 때는 무음으로 해뒀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