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에 미끄러진 이모가 결국 산에서 욕을 했다.

-한 가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오른 팔공산 갓바위에서 욕 나오게 한 아저

by 코알라

-설 연휴에 팔공산 갓바위 등산 갈래?

-좋아.


설 연휴 등산을 제안한 막내 이모와 나는 딱 12살 차이 띠동갑이다.


우리에겐 같은 '쥐띠'라는 공통점보다 더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혼기가 지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이라는 타이틀이다.

외갓집과 우리 집 온갖 촌수를 통틀어 미혼 여성은 우리 둘 뿐이라는 점이 서로를 더 애틋하고 끈끈한 사이로 만들었다.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에 힘든 일이 있으면 30년 이상 한 직장에 몸 담고 있는 막내이모에게 전화 걸어 조언을 구하곤 했고, 이모도 속상한 일이 있는 날엔 나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하곤 했다.




강력한 공통점만큼 강력한 차이점은 막내이모는 잘 나가는 금융권 종사자, 완전 '골드미스'라는 점이다.

저 가냘픈 몸에서 그런 깡다구와 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이모는 아직까지 일에 대한 열정이 어마무시하다.

승진을 위해 작년 한 해 휴가도 반납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 전국 상위권에 드는 실적 성과와 한 개도 받기 힘든 표창을 3개나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반대로 승진에서 미끄러졌고, 이로써 해낸 만큼 보상받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라는 이모에게 올해는 '절망'으로 시작되어 버렸다.


이모는 갓바위에 올라 부처님께 승진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려볼까 하던 찰나 날이 갑자기 너무 추워져 생각만으로 그쳐버린 계획 때문에 승진에 미끄러진 건 아닌지 자책했다 한다.

여러 방면에 의미를 두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하는 것도 나와 비슷하다.


-음력 1월 1일은 아직 안 지났잖아! 갓바위 등산으로 올해를 다시 활기차게 시작하는 거야!

이모에겐 청춘물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화이팅 넘치는 오글거리는 대사들이 잘 먹힌다.

내 손이 오글거리다 사라질 것을 각오하고 온갖 화이팅 넘치는 대사들을 카톡창에 쏟아냈다.




음력설이었던 1월 22일이 지나고 1월 23일 월요일, 우리는 아침 일찍 팔공산 갓바위에 올랐다.

얇은 티를 몇 겹씩 겹쳐 입고 두꺼운 플리스 집업을 입어 몸은 춥지 않았지만, 장갑을 깜박하고 챙기지 않아 손 끝이 아렸다.

집에서 갓바위로 가는 버스가 있는 덕에 자주 갓바위 등산을 하던 나와 달리, 몇 년 만에 오른 갓바위를 이모는 버거워했고, 곳곳에 놓여있는 등산객 쉼터를 쉬지 않고 이용했다.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봐, 예전엔 이 정도로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얼마나 남았어?"

"힘들면 천천히 쉬어가자, 근데 아직 반도 안 왔어... 멀었어. 이모 운동 좀 하긴 해야겠다."

"그래... 이렇게 산을 오르는 것도 힘든데, 승진은 오죽 힘들겠어... 한 번에 되는 게 어딨겠니... 그렇지만 진짜 작년에 내 실적이며 표창이며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 미끄러진 거야!!"


이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기복이 심했다.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의 끝은 '승진에 미끄러진 현실'에 대한 분노와 원망, 절망이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운 때가 안 맞으면 그게 또 안되더라고... 운때가 안 맞았다고 생각해 이모, 그렇게 생각하고 털어내야 이모도 스트레스를 덜 받지."

"그래... 운이 안 맞은 거겠지? 난 분명 최선을 다했는데..."

내 말에 수긍하는 듯 이모의 분노 섞인 말투가 사그라들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잠시 정적이 생긴 틈에 옆 의자에 앉아있던 중년남성 등산객의 우리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말을 걸 듯한 분위기를 감지했을 때 얼른 이모를 데리고 일어섰어야 했는데, 운때가 맞지 않은 듯 일은 벌어져버렸다.




"두 분... 모녀 사이세요?"

어르고 달래며 이모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려던 내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모에게서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을 듯한 분노의 아우라가 진하게 느껴졌다.

나마저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모가 정말 아저씨와 한 판 뜰 것 같아, 개미 목소리로 답을 했다.


"아니요...(이제 그만하세요. 제발)"

"아... 아니, 친구 사이는 아니잖아? 친구로는 안 보여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다간 사단이 날 것 같았다. 이모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모, 이제 그만 쉬고 다시 올라갈까?"

"그래."

그 아저씨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를 계속 쳐다보았지만, 계속되는 배려 없는 아저씨의 호기심에 장단 맞춰주고 싶진 않았다.


"아니, 친구 같아 보이지 않으면 자매사이냐고 물을 수도 있는 거지, 상대방 기분도 생각하지 않고 저렇게 막말을 해대는 실례가 어딨어! 안 그래? 저 아저씨 눈이 삔 거 아냐? 우리가 무슨 모녀 사이야 안 그래 이모?"


이모와의 정적이 무서워 입에 모터 달린 듯 쉬지 않고 말을 해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모가 한 마디 조용히 날렸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오른 산에서 저딴 말을 들어야 되는 거야? XX"


나는 난생처음으로 이모 입에서 나온 욕을 들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원색적인 욕은 절대 하지 않은 이모였는데, 분노와 절망을 덜어내고 마음을 다 잡으러 온 산에서 결국 욕이 나올만한 일이 생겨버렸다.




이모는 애써 쿨한 척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린 듯 표정이 좋지 않았고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승진에서 미끄러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모녀사이'라는 말까지 들어버려 타격이 큰 듯했다.

나이 먹을수록 가장 듣고 싶은 말은'예쁘다'가 아니다. '젊어 보인다.' 혹은 '그 나이로 안 보인다.'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 가득한 마음에 저런 말까지 들었으니 오죽했을까?


"이모, 내 인생에 중요하지도 않은 지나가는 엑스트라 1인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 마음 아까워."

"그래, 나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모, 갓바위 부처님은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대. 오늘 열심히 우리 기도하고 가자."

"진짜? 오케이~ 좋았어~"


갓바위의 1365개의 계단이 시작되는 시작점에 놓인 팻말엔 이렇게 적혀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시는 갓바위, '약사여래불'.

나는 동네 앞산 마실 가듯 자주 가던 산이라, 팔공산 갓바위에 오르고 내리는 일을 쉽게 생각했지만, 사실 이 한 가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각 지역에서 온 관광객들이 사계절 내내 찾는 유명한 산이다.

이곳에서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있었는지 반성이 될 정도로 옆에서 본 이모는 무언가를 읊조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등산화를 신고 벗기 귀찮다며 절도 잘하지 않았는데, 이 날은 이모 따라 나도 정성껏 절도해보았다.


내려오는 등산길에선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원래 올라갈 때 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든 법인데, 이모는 부처님께 간절히 드린 소원들이 진짜 이루어질지 그 기대감에 들떠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중년 등산객의 배려 없던 질문도 다 잊은 듯, 재정비한 자신의 1년 계획들에 대해 들어보라며 내가 알던 열정이모로 돌아와 있었다.


'기대감'이라는 감정이 꽤 여러 개의 긍정적 효과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제목 없음.jpg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P.S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갓바위 사진 보시고, 올 한 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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