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랑 노는 게 제일 좋다는 엄마.
지난주 일요일, 10월에 태어난 둘째 조카의 백일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엄마가 준비한 금반지도 줄 겸 동생네 집으로 향했다.
동생네 집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IC를 이용하면 30분 정도 걸린다.
운전이 무서워 회사 출퇴근 외엔 절대 운전을 하지 않는 나는, 엄마와 단둘이 어딘가로 이동을 해야 할 땐 당연하다는 듯 엄마가 운전을 한다.
운전 좀 할 줄 안다고 보조석에 앉아 간혹 훈수를 두곤 하는데, 유독 엄마에겐 더하다.
'이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하며 말을 골라하다가도 가끔 내가 내 입을 막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데, 엄마는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화를 낸다. 그땐 찍소리 말고 엄마에게 사과하는 게 상책이다.
도착하니 동생이 미리 주문해 놓은 엄마가 좋아하는 크림 파스타와 나시고랭 볶음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놀러 왔을 때도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했다며 크림 파스타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오늘도 식탁 한 중간에 자리 잡은 크림 파스타를 보니 어릴 적 카레를 좋아한다는 내 말에 한 달 내내 카레만 해주던 엄마가 떠올랐다.
식탁에 놓인 크림 파스타를 보는 엄마의 눈이 이전만큼 생기 돋지 않음을 감지했다. 다음에는 다른 메뉴를 준비하라고 동생에게 넌지시 알려주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식사를 마치고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다 5시쯤 엄마와 나는 '이제 집에 가자'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요즘 들어 밤 운전을 버거워하는 엄마를 대신해 내가 운전하려 해도, 나의 운전실력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엄마는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엄마는 운전하고 가는 내내 요즘 관심사인 '조카들과 미스터트롯 2'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미스터트롯 2와 조카들 얘기만 하던 엄마가 거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오랜만에 나와 함께 여행 다녀오는 듯 행복하다고 했다.
"뭐가 오랜만이야, 12월에 둘이 부산 놀러 갔다 왔잖아."
이런 엄마의 사랑 고백이 나는 좋기보다는 부담스럽다.
1월이 막 시작되는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출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불도 켜지 않고 내 방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싸우고 이틀 째 연락을 하고 있지 않던 터라,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고, 일어났네?"
"어. 왜?"
퉁명스러운 내 말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무언가에 신이 난 듯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엄마 4월에 보너스 나올 거 같거든~ 그 돈으로 우리 제주도 여행 갈래? 미리 예약할까?"
"엄마는 내가 4월에도 놀고 있을 거 같아? 일할 수도 있고 다른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예약을 하면 어떻게 해! 내 일정은 생각도 안 해?"
"그래 그럼, 그때 돼서 다시 생각해 보자. 엄마 출근한다~"
엄마는 버럭 하며 쏟아내는 내 말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뒤돌아 나갔다.
아침부터 왜 그랬지?
출근하는 엄마한테 놀고먹는 자식 주제에 왜 그렇게 악다구니를 했을까?
구두 신고 나가는 엄마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라는 인간은 과거에 후회했던 짓들을 금세 까먹고, 또다시 반복해서 후회할 짓을 하고 마는 머리 나쁜 동물임이 틀림없다. 특히, 엄마에겐 더 하다.
변명을 하자면 이러하다.
첫째, 남자친구와 헤어지네 마네 다투고 난 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신경이 아주 곤두서있던 아침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엄마의 여행 제안이 좋게 들릴 리가 없다.
물론, 엄마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둘째, 회사를 그만둔 불혹의 캥거루족이 되고 나서는 나의 시간은 늘 남아돌았고, 엄마가 원할 때면 언제든 놀러 갈 수 있었다.
초반에야 내가 여행경비를 냈지만, 어느새 엄마는 백수 딸년 돈으로 여행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졌는지 경비 부담을 오롯이 엄마 혼자 하려 했다.
다 큰 자식이 아직까지 부모 돈을 '축 내고' 있다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엄마와의 여행이 예전만큼 즐겁지가 않게 되었다.
셋째, 엄마는 친구가 없다. 나랑 노는 게 세상 제일 재밌단다. 그래서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엄마는 늘 말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가서 쓰는 돈은 아깝다고...
그럴 때마다 내가 되물었다. 어차피 같이 쓰고 N분의 1로 정산하는 돈인데 뭐가 아깝냐고...
그럼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 좋은 걸 딸이랑 와서 같이 느끼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시간이든 돈이든 모든 게 아깝게만 여겨진다고 했다.
"엄마, 나이 들면 자식보다는 동년배 친구들이랑 카페 가고, 맛집 찾아다니고, 여행 가는 게 더 재밌다던데 엄마는 안 그래?"
20대와 30대 때에는 엄마와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다.
친구들과 어딜 가든 젊은 시절 먹고살기 바빠 이처럼 좋은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을 엄마 생각에 뭘 해도 즐겁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보다는 엄마와 여행하는 게 더 좋았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아이처럼 신나 하던 엄마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내가 더 기뻤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어떤 딸들과 비교해 봐도 엄마와의 추억이 적진 않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보다는 남자친구와 노는 것이 더 재밌다.
당연했던 엄마와 여름휴가 여행도 이제는 남자친구와 간 지 4년이 되었다.
이미 친구와 휴가 계획을 세웠다는 내 말에 서운해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이제는 자식 놈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며 친구들 무리에 흡수되어 주기를 바란다.
친구들은 이런 상황까지 온 것에 내 탓이 크다고 했다.
진작에 품을 떠나 가정을 꾸리든, 독립을 했으면 엄마가 이렇게까지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당연해지지 않았을 거라고...
엄마도 여가시간을 잘 즐길 수 있도록 홀로서기할 시간이 필요한데, 늘 엄마 곁에 있는 나 때문에 엄마는 그 시기를 놓친 듯하다고...
맞는 말인듯해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요즘 엄마가 친구들과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중이다.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온다는 엄마의 문자에, 티 타임까지 하고 오라며 커피 기프트콘을 보낸다.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는 딸이 보낸 기프트콘이라며 자랑하며 계획에 없던 카페까지 간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나에게 친구들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 낸다. 귀찮은 내색 없이 온갖 호응을 해주며 '아. 내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구나.'를 인지시켜 준다.
이렇게 나는 엄마를 나로부터 조금씩 독립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