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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Jan 17. 2022

육아란 답지 없는 문제집 같아서

25개월 육아의 롤러코스터

연이은 두 번의 자가격리로 밀리고 밀렸던 3차 영유아 검진을 간신히 받았다. 문진표에서 아이가 잘할 수 있는 행동들은 많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발달지연, '엄마''아빠'도 정확히 발화되지 않는 작은 입에선 하루 종일 해독 불가능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첫째 남자아이의 말이 가장 늦게 트이고 심각하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밀검사를 한 번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받았다. 소아정신과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을 손에 쥐고 나온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즈음부터 부풀어올랐던 오른쪽 눈 다래끼도 약 올리듯 쉽게 낫지 않는다. 항생제를 끊고 안약과 눈 연고만 발라주고 있는데 더 커지지는 않지만 줄어들지도 않는다. 눈 밑을 째는 것이 가장 신속한 치료방법인데 성인과 달리 아이들은 순순히 협조하지 않기에 큰 병원에서 수면마취로 진행할 수밖에 없단다. 우리는 다시 말을 잃었다.


새 책상과 의자에 흡족하신 회장님


올해 유독 비싸 자주 사 먹지 못한 딸기가 모처럼 세일해서 잔뜩 사 왔다. 딸기 두 개를 씻어 아이에게 준다. 안 먹는다. 잘게 자른다. 안 먹는다. 플레인 요거트에 섞어 준다. 덥석 입에 넣었다가 뱉는다. 사과도 안 먹는다. 바나나도 안 먹는다.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과일 안 먹는 아가'란 검색어는 없다. '과일만 먹는 아가'가 대부분이다. 아이가 밥을 안 먹고 과일만 먹어요 어떡하죠...우리 아이는 밥도 잘 안 먹고 과일은 흥선대원군처럼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입 안 과일의 입성을 거부한답니다....오늘도 어린이집에서 간식으로 나온 밤식빵에서 밤만 쏙쏙 빼고 빵만 먹었대요.....식빵같은 우리 아들........


언젠가는 먹을 것이다. 과일이든 밥이든 주는 대로 먹는 때가 오리라 믿는다. '밥'자체는 양껏 잘 먹는다. 다래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믿는다. 영유아 다래끼는 서서히 크기가 작아지면서 몸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식사도 다래끼도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라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다. 말이란 게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 물, 싫어, 하다 한 단어가 두 단어 되고 문장이 되어 수다쟁이로 태어나는 거 아니었나? 언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한 적도 없다. 일상적인 지시(목욕할까? 밥 먹을까? 주세요 등등)에 잘 따르고 혼내거나 칭찬할 때 엄마 아빠의 어조와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며 주변 환경을 살피고 적응할 줄 안다. 수용 언어는 나쁘지 않은데 표현이 되지 않으니 우리도 아이 자신도 답답한 상황이다. 요즘 부쩍 떼가 늘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소리 지르며 우는데 감정 표현이 언어로 되지 않으니 속수무책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언어로 정제되지 않는 감정이란 땅 아래 석유와 같아 잘 추출하여 안전한 통 안에 보관해야 하는데, 추출할 줄 모르고 터져나가는 감정에 떨어진 불씨가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든다.


집안 청결을 감독하시는 회장님


엄마가 수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영상매체 노출을 줄여야 합니다, 아니 늘려야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언어치료를 받는 게 중요합니다,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터집니다, 그래서 그게 언제인지 누가 아나요, 아이들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25번 문제, 만 24개월이 지난 아이가 아직 말을 하지 못할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서술하시오.' 빈 답지만 노려보다 뒷장으로 넘겨 보지만 이 문제집은 답지가 뜯겨 있다.


'말 느린 아기 프** 말하기로 효과 봤어요(강추)' 독서 육아 전문 카페에서 본 글에 솔깃해 전집을 검색해 본다. 실제로 아이들 말 트이는 데 많이 쓰이는 시리즈고 중고로 구해야 하는 책이었다. 말 트이는데 많이 도움되었다는 전집들을 몇 개 더 찾았다. 추*같은 생활동화 시리즈, 언어생활 전집, 모두 세트 전집이라 비싸고 주로 중고거래로 많이들 구하는 것 같았다. 영유아 검진 이후로 며칠간 열심히 당근에 키워드 알람을 맞춰놓고 시도 때도 없이 어플을 들여다보았다. 대부분 판매 알람이 뜨자마자 초 단위로 물건이 사라졌다. 알람 보고 채팅으로 '안녕하세요'쓰는 사이에 거래 완료가 되는 것만 세 건이 넘었다. 빨리 이걸 사야 하는데, 이 책만 구할 수 있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은데...


문득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아이가 내 옆에 앉아 사운드북을 누르며 혼자 놀고 있었다. 나는 말도 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엄마가 말이 없으니 아이도 말없이 혼자 놀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구나. 휴대폰을 치우고 아이를 무릎에 앉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흰 곰이 마음에 드는지 책을 들어 연신 뽀뽀를 한다. 뽀뽀하는 아이의 볼에 뽀뽀한다. 말랑말랑한 볼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어 어렵고 알 수 없어 재미있다. 어떤 말을 입 안에 굴리고 있다 툭 꺼내놓으려나, 조급하게 알고 싶다가 느긋하게 기다리고 싶다가. 육아란 답지 없는 문제집 같아서 우직하게 풀어갈 수밖에 없다. 답지가 없다는 건 내 답이 맞는지 틀린 지 평가할 사람도 없다는 뜻이니까. 수백 번은 읽었을 그림책을 수백 한 번 더 읽기 시작한다.


대화를 나누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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