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n의 인간은 삶을 한 번만 살지 않는다
그릇과 유리잔이 촘촘히 배열된 백화점 4층 리빙관이 가장 무섭다. 매끈한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진 내 몸이 선반에 부딪혀 이 그릇들을 전부 박살낼 수 있으니까. 카페 1층 카운터에서 커피와 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들고 2층 내 자리로 향하는 계단은 위협적이다. 꼭 계단이 아니어도 커피가 엎어지고 케이크가 뭉개질 가능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계단 칸칸마다 도사린 실수와 망신의 우주를 이겨내고 간신히 도착한 자리에서 온전한 커피를 마시며 이 말을 하자 맞은편의 남편이 빵 터진다. 내가 그래서 청약 넣을 때마다 네게 말을 못 하겠어, 너는 가능성만으로 이미 그 집에 살고 있잖아. 실제로 남편이 청약 지원한 아파트를 거론하면 내 머릿속은 선명한 로드뷰 지도로 변환하여 완공된 아파트 내부 인테리어를 마치고 이삿짐을 정리한 뒤 아이 어린이집에 보내고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찾아 골목을 헤매는 내 모습을 비춘다. 상상만으로 이사만 다섯 번은 넘게 한 것 같다.
상상사고와 상상이사를 즐기는 나의 mbti는 확신의 n- INTUITION, 직관형 인간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고 미래를 중시하며 은유적인 사고방식이 익숙한 인간이라, 정식 mbti검사를 받은 건 아니지만 s와 n의 차이를 들은 순간 직관이(!) 왔다. 나는 완벽한 n의 인간이다. 운전면허를 따야 할지 고민할 때 내가 운전하는 차가 온갖 사고에 휘말려 구치소에 수감된다면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까지 상상하는 나는 n이다. 철창 너머 떡진 머리로 쪼그리고 앉은 나를 미리 보여준 나의 상상력 때문에 아직까지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상상력은 타고나는 걸까,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능력일까? 나는 다들 수업시간에 학교 운동장에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상상하며 그 지루한 시간을 버텼다고 생각했었다. 아직 좀비물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외계의 괴물이나 적 로봇이었고 거기에 맞춰 교실 책상이 일사불란하게 재배치되어 우리 편 로봇으로 바뀌어 싸우는 상상을 했다.(이런 내용의 일본 만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세일러 문>에 깊이 빠져있을 때는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는 내가 사실은 세일러 전사라는 진실을 폭로해줄 길고양이를 찾아 하교길 구석구석 유심히 살폈다. 키는 여전히 작지만 공부는 좀 하게 된 이후로는 대학 입시에 집중했고 교실 뒤편에 걸린 한국 대학 목록을 하나하나 살피며 각 대학에 입학한 나'들'을 상상하느라 바빴다.
선명한 상상은 깨어 있는 상태로 꾸는 꿈과 같다. 내가 원하는 곳이 어디든 나를 보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상상의 자각몽은 달콤하면서도 때로 씁쓸하다. 임용고시 최종 발표를 앞두고 고시원 방에서 대기했던 2013년의 겨울, 그날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고 시험에 붙는 꿈과 떨어지는 꿈을 반수면상태로 동시에 경험했다. 합격자 명단을 클릭했을 때 분명 내 이름이 보였는데 바로 다음 씬에서 보이지 않았다. 소설 공모전에 도전할 때마다 당선과 탈락의 꿈을 동시상영으로 나란히 감상한다. 그건 앞으로 닥칠 실망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한 뇌의 책략 같기도 하고, 나름의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확실히 나는 나의 상상력을 즐거워한다. 임신 준비 기간에는 임신 성공-실패의 두 갈래로 시작된 무수한 경험의 수를 모두 겪으며 행복하고, 슬프고, 즐겁고, 우울하고, 기쁘고, 아프고, 흥미로웠다. 아이와 함께 보낼 수많은 미래를 상상하며 보낸 시간이 적절한 태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 봉지 하나로도 오후 한나절은 소비 가능한 이야기를 상상하는 나의 습관이 직업이라 재미있다. 어떻게 하냐? 마침 지금 내 책상 위에 '출동! 슈퍼윙스'가 그려진 아이 비타민 봉지가 놓여 있는데 이 봉지는 절대 놓여서는 안 될 장소에 어떤 경고처럼 버려져 있는데 첫째, 여기에 미성년자는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곳이고 둘째, 이 비타민은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은 절대 복용해선 안 될 물건이고 셋째, 봉지는 이미 빈 봉지인데...이런 식이다.
평행우주 이론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나는 나의 상상력을 기쁜 능력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군가는 인생이란 단 한 번 사는 것이라 하지만, 내게 인생은 두 번, 열 번, 몇 번이고 반복해 살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내 차를 운전하며 출근하는 우주와 걸어가는 우주가 나란히 존재한다. 9년 전 시험에 떨어진 나와 합격한 내가 얇은 벽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다. 나는 나이자, 나의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이가 될 수 있으며, 내가 방금 물건을 산 편의점 알바생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부모, 길을 걷다 스쳐간 이름 모를 누군가, 전 세계 모든 인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쉼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상상력공장은 좀 피곤한데, 오늘은 2년 만에 구인구직 원서를 제출한 날이기 때문이다. 출산 한 달 전까지 단기 기간제로 일을 했었고, 조리원 퇴소와 함께 코로나가 불어닥치면서 집 안에 갇혀 있던 2년이었다. 이제 아이는 제법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고, 내 글이 나의 경제력을 뒷받침하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고, 구체적인 내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학교 기간제 자리 두 곳에 지원했다. 3월 개학 전까지 자리가 나는대로 넣을 것이다. 그말인즉슨 나는 오늘 원서를 넣은 뒤 지원한 각 학교마다 출퇴근길을 확인하고 아이 등하원 스케줄에 맞춰 출근하고 퇴근하며 수업과 나이스 업무까지 머릿속으로 다 마친 상태라는 뜻이다. 남들 한 번 출근하는 동안 나는 두 번 출근했다. 월요일부터 실제로 출근한 것도 아닌데 벌써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