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마지막 날의 일기
크리스마스 이후 새해 이전 일주일은 올해와 새해 사이 덤으로 주어진 사은품 같다. 덤으로 붙여주는 증정품 한 번 사용해보시고 후기 남겨주세요! 새로운 책을 시작하기엔 아쉬워 읽다 멈춘 책 더미를 살폈다.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코웃음 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나 불렀니? 내 말에도 책은 더 큰 소리로 콧방귀만 흥흥거린다. 천 페이지의 3권 합본판은 320페이지에서 멈춰 있었다. 이 책을 사기 위해, 정확히는 이 책을 서점 극장 라블레에서 들이기 위해 세 달 전 내 생일날 공덕에 숙소를 잡았다.
세계문학 전문서점인 라블레는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 바닥에서 빵 부스러기만 쪼아 먹고 연명하던 참새가 방앗간 문틈으로 우연히 날아들어가 받았을 충격 비슷한 것을 느꼈다. 천국이란 나의 열망을 정확히 구현한 곳이고 여기가 나의 천국 이리라, 나는 전 세계의 끝나지 않을 소설 목록을 원해. 물론 참새는 방앗간에서 쫓겨나고 나는 서점을 통째로 살 순 없으니 가장 두꺼운 소설을 품에 안았다. 우리는 시를 읽을 수도, 철학을 공부할 수도, 그림을 살 수도 있고 밤새 토론을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에서 얻는 게 과연 정신일까? 설사 정신을 얻는다 가정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232쪽) 현대 모더니즘 소설의 3대장을 읽는다 하여 내가 21세기 현대소설 3대 작품에 들어갈 만한 글을 쓸 순 없는 법이다. 올해 한 권이라도 출판에 실패한 내가 할 말은 더더욱 아니다. 천국이란 완벽한 이상향이고 함부로 입장할 수 없는 곳이니까.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조바심 내며 읽고 썼다. 2021년 총 독서량은 111권, 18만 자 정도의 장편소설을 완성했고 두 편의 단편소설 초고를 썼고 브런치북 에세이 한 권을 발행했다. 메일함에 수십 통의 출간 거절 메일이 쌓이고 그보다 더 많은 침묵을 답장으로 받았다. 예술인활동증명 인증을 받고 창작지원금은 떨어졌다. 시간의 열차에서 동행한 2021년에게 묻고 싶었다. 올해 내가 받은 건 온통 거절뿐이야, 내게 줄 건 없니? 2021년은 멍하니 나를 보다 고개를 숙인다. 곧 내려야 해서 그만 지나가겠습니다- 약 5시간 뒤에 열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리면 2021년은 하차할 것이다. 원망할 틈도 주지 않고.
어차피 내릴 사람 붙잡고 할 말도 더 없으니 새롭게 승차할 2022년에게 줄 것들을 헤아린다. 새로운 글쓰기 목표, 독서 계획, 굵직한 내년의 할 일들, 계획을 세우고 새 마음으로 쓸 물건들을 주문한다. 가열찬 창작을 도모하고자 블루투스 키보드를 구입하고 새해 첫 달 읽을 새 책을 산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특성 없는 남자가 또 콧방귀를 큰 소리로 발사한다. 지금 집에 있는 책이나 읽어 보시지, 예를 들면 나? 알겠으니까 삐진 척 그만 하고, 일단 아들 저녁 좀 챙겨주고 나도 남편도 올해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 그리고...
그리고 남은 것은 현재의 시간. 낮잠 푹 자고 일어나 좋아하는 간식을 먹고 피아노 장난감을 뚱땅거리는 두 돌 아기가 가진 것은 오로지 현재의 시간, 오늘이 12월 31일이고 내일은 1월 1일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아이의 세계는 좁고 깊다. 과거와 미래가 분리된 현재는 극대화되어 지금 이 순간을 몰입하게 한다. 지금 먹는 시금치 된장국은 나쁘지 않군, 밥 먹고 미끄럼틀 타는 건 재미있군, 뽀로로 동요는 언제 들어도 즐겁군, 저 조그만 머리로 이런 생각을 하려나 상상하니 엄마 아빠는 행복하군, 미소 짓는 내 옆으로 2021년이 슬쩍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올 한 해도 수고하셨습니다.
나 역시 슬쩍 손을 들어 2021년을 향해 흔든다. 나쁘지 않은 일 년 동행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