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와 에세이와 최근황 알림
급성 폐렴과 폐렴의 초대로 줄지어 찾아온 장염으로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든 아이를 돌보기 위해 연가를 물처럼 쓰다 정신을 차리니 여름방학식이 열렸고 1학기가 끝났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만연체의 문체와 같은 2022년 상반기였고 나는 아이 얼굴만 봐도 체온을 맞출 수 있는 능력과 각종 바이러스 이름과 여유로운 통장 잔고와 소아병동 입원실 바닥에 수그리고 기워낸 470매가량의 소설 원고를 얻었다.
아픈 아이를 떠매고 병원과 어린이집과 직장을 금정역 1-4호선 환승하듯 뛰어다닌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앞선 글에 다 나와 있다.
통장 잔고에 대한 건 상대적인 관점인데, 일반적인 30대 후반의 안정적인 직장인의 기준으로는 10호봉 기간제 교사의 월급이란 배냇저고리와 같은 젖내 폴폴 풍기는 앙증맞은 액수겠지만, 1년에 딱 한 번 받을 수 있는 창작지원금도 떨어졌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던 가난한 예술가에게 월급이란 과연 내가 이 정도까지 받아도 되는 가치 있는 인간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대체로 내 노동량만큼의 액수를 얼추 정산해 내기에 낮에 일하고 밤에 아이를 재운 뒤 소설을 쓰겠다는 야심은 진작 산산조각이 났다. 책상에 널브러진 조각들을 급히 모아 기워내어 뭘 쓰기는 썼는데 꼴을 보아하니 세상 밖으로 나오진 못할 것 같다.
소설도 이 지경인데 브런치는 처참하여 이런 식으로 이 계정을 운영하다간 별 한 개 리뷰가 줄줄이 달리면서 '맛은 평범한데 오픈 시간이 일정치가 않아서 혹시 사장님이 건물주신가 했네요? 진짜 건물주가 취미로 운영하는 곳이면 인심이라도 좋아야지 않나요?'같은 한 줄 평이 올라올 것만 같다.
텅 빈 백지란 비옥한데 노는 땅과 같아 '노는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면 수천 가지 쓸모없는 잡초들만 무성해지듯, 그래서 그 땅을 쓸 만하게 유지하려면 우리 용도에 따라 어떤 씨앗들에 알맞게 개간해서 파종해야 하듯.'(미셸 드 몽테뉴, 에세 1권, 80쪽) 최소한의 용도가 필요하고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의 형식인 '에세이' 장르 자체를 만들어 버리신 몽테뉴를 찬양하며 우리 다 같이 새로 번역된 [에세]를 읽고 에세이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은데, 책은 총 세 권에 거의 2000페이지에 육박하고 이걸 여름방학 때 다 읽겠다고 호언장담한 과거의 내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오겠다.
여름방학은 절반이 남았고 [에세]는 아직 1권 140페이지에 머물러 있고 우리는 다음 주 가족여행을 떠나고 나는 뭐라도 쓰긴 써야지, 이 땅에 뭘 기르긴 해야지, 고민하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에세이고 에세이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샛길로 가지치고 지류로 갈라져 물 흐르듯이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사라 베이크웰, 어떻게 살 것인가, 417쪽)이라는, 몽테뉴 관련 서적에서 분석한 최초의 에세이인 에세 특성이 그렇다 하기에, 나 역시 의식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떠내려온 결과 이렇게 글 한 편을 완성하게 되었으니 무엇이든 뭔가 막힌다 싶으면 근본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