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드가 심심하면 버피로 간을 맞춰 보자
의외로 버피Burpee를 알게 된 계기는 크로스핏이 아니라 웹툰이었다. 12년 전 완결된 다음 웹툰 <다이어터>에서 고도비만인 주인공 수지가 사기꾼 트레이너 찬희를 만나 살을 빼게 되는데, 작중 임팩트 있게 다루는 운동이 버피였다.
‘악마의 운동’이라는 수식어를 아끼지 않고 사용한 이 운동은 보기에는 간단했다. 친절하게 설명된 운동법을 따라 방바닥에서 동작 마지막 점프를 제외하고 두 개를 시도해 보았다. 만화를 보면서 평온했던 호흡이 두 개만에 격해졌다. 힘들군, 역시 나는 운동과 맞지 않군! 되새기며 그대로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
버피는 참 좋은 운동이다.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유산소와 무산소 운동이 동시에 가능하고, 체력과 운동 경력에 맞춰 섬세하게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다. 오늘 갓 운동을 시작한 초보자와 5년 이상 운동 고인물을 동시에 버피 하나로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다. 숨통 끊는 운동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크로스핏에서 당연히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작이 버피다. 사랑이 넘쳐흘러 ‘이 좋은 운동을 더 많이 더 널리 알려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온갖 와드에 버피를 집어넣는다.
데드리프트에 스내치만 하면 심심한데? 끝에 버피를 넣어 와드 간을 맞추자. 너는 크로스핏 1년 이상 했지? 그냥 버피 말고 네가 방금 스내치 하고 바닥에 집어던진 바벨을 뛰어넘는 버피bar facing burpee로 수행하도록 해, 그래야 재미있잖아.
1분에 로잉 머신 10cal은 거뜬히 타지? 오늘 와드 기록은 1분 안에 로잉을 타고 남은 시간에 수행한 버피 개수로 계산할 거야, 근데 제자리에서 버피는 단조로우니까 버피 마지막 동작에서 로잉 머신을 뛰어 넘어가는 걸로(burpee over row) 업그레이드할게.
이제 다들 맨몸 풀업은 쉽게 하는 것 같네? 철봉 아래서 버피를 하면서 끝에 풀업까지 할 수 있도록 하나의 동작으로 만들어 봤어burpee pull-up, 너무 재미있지 않아? 와드가 심심하다 싶으면 버피로 간을 맞추면 딱 좋다니까.
버피의 존재감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날 와드에 버피가 따끈한 국물 위로 딱 한 방울 떨어뜨린 들기름 마냥 첨가되어 있으면 와드 전체에 버피의 향이 난다. 아무리 다양한 동작을 했어도 와드가 끝나면 버피 생각만 난다. 다들 버피 얘기만 한다. 나야, 버피, 오늘도 네 숨을 넘어가게 해 줄게, 팔과 다리와 네 몸 모든 부위를 고통스럽게 해 줄게, 짧은 시간에 체지방을 활활 불태울 수 있도록 해 줄게, 운동의 보람이 곧 삶의 기쁨임을 알게 해 줄게....오늘의 와드에 버피가 없으면 심심하다.…..내가 뭐라고 썼지? 이게 다 크로스핏의 총애에 교만해진 버피의 세뇌 계략이다…
버피는 정말 좋은 운동이다. 유산소와 무산소를 동시에 할 수 있어 시간을 아낄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 휴대용 운동이라 할 수 있으니 귀엽고 편리하다. 나는 과정이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게 싫다. 항상 상상한다. 얼굴만 들이대면 화장한 얼굴로 완성해 주는 기계를, 요리 재료만 넣고 버튼을 누르면 완제품이 나오는 마법 오븐 같은 것을. 물론 과정 다 생략하고 결과만 바라는 건 욕심임을 안다. 요리 과정이 귀찮다고 센 불에 프라이팬 올리면 내게 남는 건 먹을 수 없는 숯덩이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피 같은 운동이 시간도 공간도 부족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기도하게 해 주는 티베트의 기도 기계와 같이, 쉽고 빠르게 바닥에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근육통과 호흡 곤란이 동시에 오는 버피 자체가 운동 기계가 아닌가? 운동을 한다는 인식도 없이, 인간은 살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고 이를 위해 공원을 산책하거나 산을 오른다면 좋겠지만 내게 주어진 공간이 한 뼘 방 한 칸뿐이고 남은 시간이 십 분 밖에 없다면, 고른 숨소리와 나른한 팔다리를 빠르게 뒤흔들 수 있는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바닥에 엎드린다. 기도하듯이. 우리에게 최소한의 운동을 주소서. 기꺼이 기도에 응답하는 목소리,
나야, 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