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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Jan 11. 2020

육아 전쟁 이전의 쇼핑 전쟁

육아보다 쉬운 소설 쓰기 : 육아 용품 쇼핑

평소의 나는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내가 택배로 받는 것은 오직 책뿐. 가끔 옷을 사거나 화장품을 사러 쇼핑몰에 직접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인터넷으로 뭘 잘 사질 않는다. 새벽배송과 로켓배송의 시대 나의 소비는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자전거를 타고 느릿느릿 산책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소비의 신은 속이 터져 쓰러지기 직전 한 가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내게 아이를 보낸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를 위한 물건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다. 아기가 쓸 옷과 손수건, 세제 등을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 어플을 깔고 오래전 가입했던 아이디와 비번 찾기를 눌렀다.


네게 필요한 걸 사면서 우리는 조금 신나버렸지


육아 전쟁 이전에 쇼핑 전쟁이


조리원에서 모유수유를 마치고 아이를 신생아실에 데려다 놓은 뒤 침대에 누워 사야 할 물건 목록을 장바구니에 추가했다. 아기 세제, 젖병 세제, 아기 면봉, 신생아 손톱깎이, 아기의 체온 측정은 중요하니까 체온계, 요즘 독감이 유행인데 뿌리는 소독제는 필수니까, 모유수유가 순조로울 것 같으니 수유 쿠션, 최근 육아계 잇템이라는 역류방지 쿠션, 모유만 잘 먹이리라는 확신은 함부로 할 수 없으니 분유 포트를 사야 한다, 온도에 맞춰 물을 끓일 수 있으니 나중에 차 우려먹고 커피 끓일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어느새 내 옆에서 스마트폰을 보던 남편이 쇼핑 전쟁에 참전했다.


ㅎ : 우리 가습기랑 공기청정기도 사야 하지 않나?

ㄹ : 헐, 지금 당장 골라.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각종 맘카페와 블로그 수백 개를 정독하며 제품을 고른다)

ㄹ : 드디어 골랐다! 가습기는 이걸로 주문할게.

ㅎ : 공기청정기는 방금 내가 샀어.

ㄹ : 아기 없어도 필요했을 물건들이긴 하다.

ㅎ :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ㄹ : 공청기는 왜 이제야 산 걸까... 미세먼지의 시대...

ㅎ : 이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ㄹ : ...아기 비데는 뭐에 쓰는 거지?

ㅎ : 이렇게 세면대에 고정해서 아기 응아 쌌을 때 엉덩이를 닦아주는 육아 아이템이래.

(한 시간 넘게 쇼핑 사이트와 블로그 후기글을 뒤진다)


그렇게 남편은 끝내 아기 비데를 골라 주문한 뒤, 피곤을 호소하며 장렬하게 잠이 들었다.


아직 기저귀와 분유는 주문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선택이 네 최선이기를


쇼핑의 신이시여 보고 계십니까


조리원 퇴소를 이틀 앞두고 청소 및 주문한 물건 정리를 위해 외출증을 썼다. 2주 만에 들어선 우리의 집은 2주 치의 택배 상자를 잔뜩 삼킨 채 소화불량을 호소하며 우리를 맞이했다. 가위와 칼로 상자를 하나씩 뜯고 안에 물건을 확인한 뒤 송장을 떼어내고 상자를 분리수거하는 과정이 공장처럼 반복되었다. 모든 상자를 다 뜯어 집 안 이곳저곳에 적절히 배치하고 전원을 연결해 버튼을 눌러보고 세제로 닦고 소독하고 분리수거까지 마치자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분명 무엇을 샀는지 다 아는 제품들인데, 상자를 열 때마다 이번엔 어떤 것이 튀어나올까 두근거렸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보물상자를 클릭하는 기분으로 남편과 마주 보고 앉아 이 상자 저 상자 뜯어보며 어떻게 이것들을 활용할지 수다를 떨었다. 이 아이템은 아이를 좀 더 편안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고 요 물건은 우리의 수고를 덜어줄 것이야.


쇼핑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 물건을 구입함으로써 좀 더 좋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 특히 육아 용품 쇼핑은 아이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부모에게도 유용하다는, 두 배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그냥 세제로 다 빨아버려도 될 것 같지만, 이 아기 전용 세제가 네 말랑한 피부에 닿는 옷깃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겠지.


부디 우리의 선택이 네 최선이기를 바라는 마음.


아기가 사는 집이 되었다


정리가 끝나고 조금 달라진 집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안방에 아기 침대가 놓이고 그 옆에서 가습기와 공기청정기가 조용히 호흡한다. 거실에서 젖병과 장난감을 살균 중인 소독기의 둥그스름한 몸체, 빨래 건조대 위에서 아슬아슬해 보이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신생아 양말과 손싸개. 바운서 작동을 확인한 남편이 나지막이 말한다.


이제 아기가 사는 집이 되었네.


이 집에서 2년의 시간을 둘이서 보냈다. 둘 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성격에 내 정리벽이 결합해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집 구석구석 여백의 공간에 아기 물건들이 놓이고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새 가족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우리 집, 마지막으로 오직 우리를 위해 산 단 하나의 택배를 뜯었다.


그래요 우리 모두 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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