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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Mar 06. 2020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글쓰기

패티 스미스 [M트레인]과 짧은 글 하나

-시침도 분침도 없는 시계,

그녀는 바다를 보며 머릿속으로 문장 하나를 쓴다. 은근한 만족감에 취한 그녀는 곧 이 문장이 조금 전 읽었던 책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만의 것을 써야 해, 문장과 문장을 모아 내 글을 완성해야 해.

비행기에서, 호텔 로비에서, 이 섬에 혼자 온 여행자는 그녀 하나뿐이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 3대가 모두 떠나 온 대가족들, 휴양으로 유명한 이 섬은 1인 여행객이 머물 만한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흔치 않다. 그녀는 1박에 20만 원이 넘는 호텔을 아무렇지 않게 예약해 버렸다. 그와 함께 여행을 계획했을 때 후보지로 택했던 호텔이었다.


그는 지금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단 둘이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둘은 그녀를 언급할까? 그녀를 입에 올릴 때마다 어떤 표정일까? 아직 서로에게 충실하다고 착각할 때 그들은 이 섬에 함께 오기로 약속했었다. 숙소를 알아보며 그는 방에서 반드시 바다가 보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어디서든 바다가 보여야만 해. 렌터카를 타고 무작정 달리다 해변이 보이면 멈추는 거야. 미리 수영복을 입고 차를 타서 해변에 당도하면 바로 바다에 뛰어드는 거지.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친구가 그녀보다 자신과 더 어울린다는 확신에 차서 그녀에게 함께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었음을 알렸다.


어쨌든 바다는 잘 보이는군. 면세점에서 산 위스키를 방에 비치된 유리잔에 따라 마시며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노트와 펜을 올려두었지만 펼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돌토돌한 여드름 같은 섬이나 배, 불규칙한 해안선을 따라 즐비한 횟집 간판 하나 없는 순수한 바다는 바다라는 개념 그 자체였다. 망망대해의 두 망은 잊을 망인가, 경계조차 흐릿한 바다 앞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이 서서히 흐려지고 시간도 공간도 현재를 지각하는 구체적인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바다에 대해 쓸 수 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날 독립출판 전문 서점에서 글쓰기 강연을 하며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친숙하며, 자신 있는 주제로 글을 쓰십시오. 그녀는 이 원칙에 따라 ‘카페’와 ‘순정만화’,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들을 출판한 뒤 약간의 이름을 알려 가끔씩 글쓰기 수업을 맡아 강의를 했다. 그녀의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왔다. 수강생 중 60대 남성 한 분은 지금까지 자기가 수집해 온 수석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왔다며 그녀에게 한 시간 넘게 돌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떤 주부는 아이들이 등교한 뒤 매일 오른다는 동네 뒷산에 대한 글로 책 한 권을 완성했다.


하지만 바다는?


그녀는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스쿠버 다이빙에 미쳐 있던 그는 그녀에게 지구의 60프로가 바다고 바다를 보지 않으면 세계의 절반을 모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며 단호하게 이야기했었다. 넌 작가니까 세계의 모든 면을 볼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남기고 그가 그녀를 떠난 뒤 세계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반쪽이 되어버린 세계 끄트머리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 섬에 오면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는 것에 대한 글만 쓰다 보면 나는 그저 그런 작가가 될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잃어버린 세계의 절반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행기 창문 밖으로 바다를 보고, 공항에서 호텔로 오는 택시에서 보고, 지금 방 테라스에서 한 시간 넘게 위스키를 마시며 바다를 넘치게 보아도 그녀는 단어 하나 떠올릴 수 없었다.


이 섬에 방문한 사람 중에 나만큼 짐이 적은 사람도 없을 걸. 가방 속엔 책 두 권 몰스킨 노트 한 권 만년필 하나에 잉크 카트리지 다섯 상자, 속옷과 티셔츠 네 장, 바지, 수영복 하나. 호텔 수영장 비치 체어에 앉아 있으면 호텔에서 수영장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비치백을 저마다 짊어진 남자와 여자 옆에 자기 몸만 한 크기의 튜브를 들고 가는 아이들, 접이식 의자와 비치 타월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서는 사람들. 호텔 바로 앞바다에서 오후 한 때를 보내기 위해 저 많은 짐이 필요하다.


그녀는 손에 든 패티 스미스의 에세이 표지를 응시한다. 눈이 마주친다. 가방에 책과 노트와 약간의 옷만 챙겨 런던으로 날아가 하루 종일 호텔에서 범죄 드라마를 시청하는 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 오직 작가의 묘지 사진을 찍기 위해 일본으로, 영국으로, 전 세계로 떠나는 사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쓰는 사람.


그녀는 패티 스미스를 따라 짐을 간소하게 꾸려 이 섬에 왔다.


에세이에서 작가는 단골 카페를 왕래하는 하루의 의식에 대해 쓴다. 그녀는 책 속 그녀를 따라 카페를 찾아 호텔을 나섰다. 책에 묘사된 이노 카페 같은 곳은 찾기 힘들었다. 대충 스타벅스에서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사서 해변 벤치에 앉았다.


바다가 나를 놓아주질 않는군.


그녀는 방금 떠오른 이 문장을 메모하고 싶었지만 노트를 깜박하고 방에 두고 왔다. 결정적인 문장이라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래처럼, 바다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문장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녀의 발치에 흰색 꽃 한 송이가 떨어져 있다. 노란 금테를 두른 이 꽃은 섬의 상징이다. 그녀는 꽃을 들어 반쯤 마신 커피 잔 위에 띄웠다. 밤하늘 유일하게 존재하는 거대한 별 같았다.  


넌 정말 바다만큼이나 쓸모가 없구나.


엄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창밖으로 파도 소리가 과장되게 들렸다. 몇 년 만에 듣는 목소리는 파도 소리만큼이나 생생해 엄마가 실제로 호텔 방 안에 들어온 줄 알았다. 새벽부터 하루 두 개 이상의 일을 하며 그녀를 홀로 키워낸 엄마는 그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명했다. 엄마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란 시간당 최저임금 이상의 돈을 벌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돈이 되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돈을 써 여행을 떠난 그녀 앞에서 크게 화를 낼 것이다.


그녀는 호텔 메모지에 꿈을 통해 전달된 엄마의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바다만큼이나 쓸모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시침도 분침도 없는 시계, 시간을 알아내는 데 전혀 쓸모가 없는 물건. 책 속 패티와 남편 프레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가운을 걸치고 테라스에서 검은 바다를 바라본다. 저 검은 세계를 쓸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쓰기란 쉽지 않아’


책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이 글은 일 년 전 하와이 여행에서 패티 스미스의 [M트레인]을 읽고 쓴 것이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수십 번 읽은 책을 한 번 더 읽고,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내용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소설이나 독후감 같은 특정한 형식을 의도하진 않았다. 바다 위에 띄운 튜브처럼 파도에 몸을 맡기고 떠오르는 대로 썼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몸을 구겨넣고 썼다


긴 여행을 가게 되면 반드시 챙기는 책. 책의 모든 페이지를 씹어 삼켜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픈 책.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이 글은 내 짝사랑의 시시한 실패담이다.

아무것도 아닌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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