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과 ‘도를 아십니까’의 기억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한 사이비 종교단체가 연관검색어로 핫하다. 종교 길거리 캐스팅 1순위였던 나는 한동안 종교 단체 조사에 열을 올린 적이 있었다. 종로 어학원 앞에서 내 기가 환히 빛나고 있다던 아주머니, 홍대 골목에서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해 심리 테스트 좀 부탁한다던 두 여학생, 동대 재학 당시 후문에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며 언덕 꼭대기 중앙도서관까지 숨을 헐떡이며 쫓아왔던 학우, 강남역 코 앞에서 교보문고 위치를 묻고는 이것도 인연인데 깊은 대화가 필요하다며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기자던 분들...
그분들 눈에 순진무구한 내 얼굴이 백지처럼 보였을까, 쓰는 족족 받아들여 흡수하는.
부모님은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이고, 내가 호기심에 여름 성경학교에 가도 신경 쓰지 않으셨다. 선물로 장난감을 준다는 말에 참여했던 성경학교는 지루했고 무엇보다 선물이 추첨제라 나와 내 동생은 뽑히지 않아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다만 궁금했다. 급식시간에 숟가락을 들기 전 두 눈을 감고 성호를 긋는 단짝의 엄숙한 손짓에 실린 '무엇'인가가 나를 건드렸다. 수학여행으로 방문하는 절 본당 안 금빛 부처님 상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첫 해외여행지였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벽에 새겨진 낯선 신의 모습이, 유럽 여행 중 아무 성당이나 들어가면 느껴지는 공기가 궁금했다.
궁금하다고 무작정 교회나 절에 찾아가 소속되고 싶진 않았다. 초등학생 때 다니던 미술학원 꼭대기층에 교회가 있었다. 어느 날 몸집이 크고 땀을 뻘뻘 흘리던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우리를 붙잡고 자기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보여주더니 누가 가질 거냐 물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 앞에서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말했고 그는 갑자기 화를 내며 여기서 나가라고 삿대질했다.
이 빌딩은 하느님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여기 있을 수 없다.
다짜고짜 믿지 않는 자는 꺼지라는 강압이 혐오스러웠다. 기성 종교의 권력과 사이비의 맹목은 나와 전혀 맞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읽는 일뿐이었다. 성경과 불경, 각종 종교 전문서들, 종교를 갖고 싶진 않지만 종교에 준하는 질문과 호기심을 가득 품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최근 읽은 책에서 내게 꼭 맞는 단어를 찾아냈다.
경외주의aweism는 궁극적으로 실존이 아름다운 신비이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의 원천이고, 창조와 시간, 공간 같은 실존의 심오한 문제들이 깊은 기쁨과 통렬한 아픔, 숭고한 경외감을 자아낼 정도로 강력하다는 개념을 압축하고 있다. 경외주의는 또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 우주가 생겨나게 된 과정과 이유는 누구도 영원히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믿음에 겸허하고도 행복하게 기초하고 있다. 이런 통찰은 우리를 맥도 못 추게 만들지만 동시에 계속 춤추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경외주의자는 살아간다는 것이 놀랍도록 신비로우며 삶이 심오한 경험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경외주의자는 역사학자 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는 가브리엘 마르셀과 앨런 왓츠의 통찰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이끌어 냈다. 즉 어떤 문제들은 풀 수 있지만 깊은 신비들은 풀리지 않으므로 즐겨야 한다. 우주와 실존의 그런 신비를 받아들이면 더욱 행복할 수 있다. 경외주의자는 또(자칭 불가지론자인)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이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학문의 요람에 서 있는 근본적인 감정이다. 이 감정이 낯선 사람, 더 이상 감탄하지 못하는 사람, 넋을 잃고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완전히 꺼져 버린 촛불과 같다."라고 했다. -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나는 내 삶이 신기하다. 내가 살아있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 움직이며, 삶과 삶이 이어져 거대한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경이롭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밤을 샌 뒤 동트는 하늘을 바라볼 때, 카페에서 글을 쓰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낳은 아이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강렬하게 무엇인가 느꼈고 그걸 단순히 신으로 ‘퉁’치기엔 복잡하고 미묘하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신실하게 믿음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종교인을 부정하고 공격할 마음은 전혀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목도했을 때, 신을 향한 불가능에 가까운 믿음이 부러웠다. 성당 안 침묵과 불상 앞 포개진 두 손을 존중한다. 내가 끔찍하게 여기는 건 길가는 나를 억지로 잡아끄는 ‘도를 아십니까’ 부류들이다.
길에서 자꾸만 나를 붙잡으려던 자들에게 강한 반감을 느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나를 단순한 백지(치?)로 취급한 것에 대한 분노와 함께 내가 스스로 느끼고 탐구할 존재의 신비를, 답이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 ‘우리가 그 답을 안다!’고 확신하는 오만함을 경멸하는 마음.
학교 앞 카페에서 혼자 앉아 있던 내게 성경을 손에 쥐고 영생에 관심 있냐며 바이러스처럼 신앙을 전파하려던 그 아주머니께선 지금 잘 지내고 계실지. 저는 영원한 삶에 관심 없구요, 경외하는 마음으로 잘 살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