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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Mar 08. 2020

언제 어디서나 쓴다

엄마 소설가라는 존재

아기띠와 스마트폰이 있어 다행이다. 아이를 안고 글을 쓸 수 있으니까. 두 손 자유롭게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메모한다. 2주 간 100매 넘게 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사실 여성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쓴다. 막혀 있던 이야기가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질주한다. 소설은 달려가고 아이는 잔다. 모두 제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한다.


잠든 뒤통수


수유를 마치고 잠든 아이를 역류방지쿠션에 내려놓은 뒤 수유쿠션에 책이나 노트를 올려놓는다. 수유쿠션이 단단해 작은 책상 역할로 제격이다. 세 명의 주인공, 그중 한 명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뒤로 도망칠 것인가? 묻고 더블로 가?? 주인공의 선택을 기다리며 칭얼대는 아이에게 모빌을 보여 준다. 흑백 모빌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음악이 나오고 아이는 두 팔을 뻗어 눈 앞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잡아 보려 애쓴다. 나의 주인공 역시 한 팔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다. 손을 펼쳐 무엇인가를 움켜쥔다.


나는 손을 뻗어 펜을 잡는다.

눈 앞에 보이는 어떤 것을 잡기 위해.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해요


임신을 확인한 뒤 나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첫째, 임신과 출산 이후로도 꾸준히 소설을 쓴다. 둘째, 임신 및 출산과 육아 일기를 쓴다. 육아와 소설 쓰기를 병행하겠다는 가시밭길을 향해 한 발짝 떼며 이 여정에 어떤 제목이 어울릴지 고민했다. 육아, 소설, 둘 다 하니까 몽땅 넣어 버리자, 해서 ‘육아보다 쉬운 소설 쓰기’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소설 창작이 쉽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지금 아이를 끌어안고 마른 수건에서 물방울을 쥐어 짜내듯 한 줄 두 줄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잠투정하는 아이만큼이나 나를 힘들게 한다. 어쩌자고 나는 주인공을 세 명이나 뽑았을까? 머리 셋 달린 지옥의 광견처럼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 사연을 떠들어대고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을 틈을 찾아 헤맨다. 소설이 슬슬 써진다 할 때쯤 아이가 잠에서 깬다. 운다. 수유할 시간이다. 참신한 묘사가 번뜩 떠올라 노트를 펴고 아이가 운다. 기저귀 터지도록 똥을 쌌다.



‘육아를 하다’와 ‘소설을 쓰다’의 두 목적어는 자유라는 기준에서 구별된다.


육아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아이에게 나는 부모라는 권위를 가지고 먹는 것, 입는 것, 말과 행동, 생활 습관과 건강 상태를 선택하고 가르치며 통제할 힘이 주어진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방 안 온도와 습도를 칼같이 맞춰도 아이 피부에 태열이 올라올 수 있다. 3시간 텀을 지켜가며 순조롭게 수유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평소의 반만 먹고 혀로 밀어내고 울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육아의 주체는 부모인 ‘나’와 아이 ‘너’로 구성되는 2인칭의 복잡한 구성이다. 나는 끊임없이 너를 고려하고 너를 신경 쓰며 일해야 한다. 부모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란 불가능하다.


육아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2인칭은 어렵다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 나는 자유롭다. 인물의 탄생부터 결말까지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무한대로 상상한다. 아기 침대 옆에서 나는 내 주인공을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보내 좁은 골목길을 걷게 할 수 있다. 분유를 타며 머릿속으로 내 인물이 브라우니를 먹으며 마음껏 수다를 떨게 내버려 둔다. 우리 집 냉장고에도 브라우니가 있지만 오늘따라 아이가 자주 보채 달래고 재우느라 먹을 틈이 없다. 육아의 제한된 자유를 소설 속 상상의 자유로 풀어낸다. 나 대신 내 주인공들에게 브라우니를 선사한다. 맛이 어때?     


작가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연필과 약간의 종이야. 그거면 충분해. 자기 홀로 그 연필을 책임진다는 걸, 그 연필로 종이 위에 쓴 것을 자기 홀로 책임진다는 걸 알고 있다면 말이지. 즉, 자기가 자유롭다는 걸 안다면 말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건 아냐.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어쩌면 정말 조금밖엔 자유롭지 못할지도 몰라. 어쩌면 간신히 얻어낸 짧은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글 쓰는 여성이 되어 머릿속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오로지 이 순간에만 자유로울지도 몰라. 하지만 이때만큼은 책임을 지는 거야. 이때만큼은 자율적인 거야. 이때만큼은, 자유로운 거야. - 어슐러 르 귄, [분노와 애정]      



엄마 소설가라는 존재가 가능할까? 그럴듯하게 제목까지 정해 놓고 끝없이 불안했다. 둘 모두 잡아 보려다 둘 다 놓쳐버리지 않을지, 애초에 불가능한 꿈이 아닐지?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여성 작가들의 엄마됨에 대한 글 모음집을 읽으며 확신했다. 작가란 쓰는 사람이다. 단 일 분이라도 시간이 생겨 노트와 펜만 갖춘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다. 노트를 펼 공간이 여의치 않다면 스마트폰으로도 쓸 수 있다. 엄마인 나, 쓰는 나, 이 모두가 나라는 존재다.


여기에 여자라서, 엄마라서 불가능한 것은 없다.


소설 속에서 브라우니 하나에 행복해하는 주인공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눈으로 아이를 살핀다. 든든한 위장과 뽀송해진 기저귀를 차고 적절한 온습도에 감싸여 잠든 아이의 얼굴에 깃든 평화. 나는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잡는다. 아이의 숨소리가 잘 쓰인 문장처럼 고른 리듬으로 평화를 묘사한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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