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책만 진득하니 오래 읽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내 다리는 두 개지만 독서가인 나는 문어발처럼 한 번에 수 권을 쌓아두고 이 책 읽다 저 책 폈다 다른 책에 눈을 돌린다. 책상에 읽는 중인 책이 수북이 쌓여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이를 안고 책을 읽기 여의치 않아 블루투스 스피커로 문학 팟캐스트를 듣는다. 신형철 평론가님을 무척 좋아해 6년 전 진행하셨던 <신형철의 문학이야기>를 다시 듣는다. 오프닝에서 소설의 한 구절을 낭독하시는데 왜인지 귀에 익다. 앗,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잖아, 세 번은 읽었던 소설인데 읽어주시는 대목이 새롭다. 서재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이 책을 2010년에 샀네, 벌써 10년 전이네, 다시 읽어도 또 좋네.
154쪽,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 냈다. (이 경우 연이은 뺄셈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 (이 경우 덧붙은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
밀란 쿤데라 [불멸]
독특한 메타픽션인 이 소설은 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아녜스와 남편 폴, 그녀의 여동생 로라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과거 괴테와 그에게 직진하는 베티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스물여섯 살의 베티나는 불멸을 갈망하며 예순두 살의 괴테에게 접근한다. 전설적인 대문호의 어린 연인으로서 역사에 남기 위해.
괴테와 베티나의 관계에 대해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언급한 대목을 소설에서 재인용한다. '이 사랑스러운 여인은 그에게 부과되었고, 그는 실패했다.' 마침 집에 [말테의 수기]가 있네, 펭귄클래식 번역본은 이 대목이 이렇게 번역되었다. '사랑에 빠진 이 여인은 그 시인에게 주어진 과제였지만, 시인은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쿤데라는 베티나의 괴테를 향한 사랑이 의도적이라 해석하고, 릴케는 그 사랑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라 이해했다. 쿤데라의 해석은 흥미롭고 릴케의 문체는 아름답다. 유명한 첫 문장,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여기에 끌려 책을 샀다. 출간 연도가 2010년이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읽은 건 2012년이다. 8년 전의 내가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15쪽, 자기만의 죽음을 갖겠다는 소망은 이제는 점점 더 진귀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그런 죽음은 자기만의 삶만큼이나 드물어질 것이다. 아, 이젠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와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삶을 찾아서 걸치기만 하면 된다.
릴케 [말테의 수기]
내 마음대로 자기만의 '죽음'에 '자아'를 넣고 읽는다. '자기만의 자아를 갖겠다는 소망은 이제는 점점 더 진귀해지고 있다.' 나만의 유일무이한 자아가 가능할까? 쿤데라의 어법에 따르면 자아를 찾아서 빼거나 더하는 방법 모두 자아를 잃을 수도 있다.
나는 '자아의 덧셈법'의 열렬한 추종자로, 내 자아는 수많은 책들의 제목과 저자, 베껴 쓴 문장들로 가득 찬 거대한 서재와 같다. 이 글도 내 자아가 '다독가'임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 한 책을 네 번이나 읽었다는 은밀한 자랑까지 덧붙여.
[말테의 수기]는 두어 번 읽었으나 오히려 릴케의 시는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다 릴케의 시를 각 잡고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 적 있다.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읽으며 그는 이렇게 쓴다.
268쪽,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을 따라 루브르의 토르소를 상상하며 느긋하게 시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 마지막 구절이 죽비처럼 어깨를 내리친다. 왜인가.
첫째, 바꾸라 했으니 'A에서 B로'라는 지침이 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둘째, 언제 이 구절을 읽든 우리는 똑같은 명령을 다시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꾸려고 노력했는가? 계속 더 바뀌어야 한다.'요컨대 아폴론의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몸통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언제나 그처럼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상태에 있다고, 그러므로 변화란 '예외도 없고 끝도 없는'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말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나는 이 시를 자주 복용한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그는 릴케의 문장에 충격을 받고 나는 그의 문장에 직격타를 맞는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기쁨이고 보람이지만 방심한 순간 어떤 공허가 나를 덮친다. 이제 나의 삶은 끝났는가? 존재감 흐릿한 사람 1로 남을 것인가? 집에 갇혀 반복된 일상에 꾸벅꾸벅 조는 나 자신을, 색다른 분야의 책으로 벼락같이 깨울 필요가 있다.
서재를 둘러본다. 10년 넘게 부지런히 나의 자아를 두텁게 하기 위해 사들인 책들, 가장 나 답다고 생각하며 모아 온 장서들. 부풀려진 나의 자아 앞에서 복용할 만한 책을 탐색한다. '그러나 라캉은 어떤 대상도 주체의 특징인 결여를 채울 수 없고, 또한 어머니가 된다고 해서 분열된 주체로서 여성이 겪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했다.' 무심코 집어 든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에서 눈이 번쩍 뜨여 처음부터 읽기로 결정한다. 내 무의식이 제목의 '불안'에 반응한 것일지 모르겠다. 또 라캉이 튀어나왔으니 슬라보예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을 같이 읽고 가라타니 고진의 [천 개의 고원]을 들춰볼지 모르겠다.
독서에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목적과 수단의 얽히고설킴 속에 한 문장을 읽고 한 권을 읽고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 육아 및 코로나 대유행으로 인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의식의 흐름 독서법'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놀이이자 작업 방식이다. 공들여 구축한 서재 안에서 책과 책을 이어 주며 읽고 쓰기. 그 안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색다른 글을 완성할 수도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 글이 막힐 때면 나는 나의 서재를 복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