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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Jun 07. 2020

아이는 사랑을 먹고 큰다

백일 간의 모유수유 후기

진작 끝난 모유수유지만 이에 대한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다 지웠다. 아이의 백일 전후로 끝이 난 모유수유를 생각하면 조리원에서 꿨던 꿈 하나가 떠오른다. 새벽 수유 콜을 착실하게 받다 누적된 피로로 건너뛰었던 밤 꿈속에서 나는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어쩐지 한국 같은 꿈속 유럽의 한 도시에서 쌍쌍바를 먹으며 거리를 걸었다. 잠에서 깨자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두 가슴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똑바로 누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서둘러 유축을 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꿈속의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현실의 나는 모유로 가득 찬 가슴에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


출산 3일 뒤 샤워를 하러 옷을 벗다 깜짝 놀랐다.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줄줄 새는 가슴 때문에 앞섶이 온통 다 젖어 있었다. 내 몸에서 피와 땀, 눈물과 배설물을 제외한 낯선 것이 솟아났다. 눈도 못 떼는 신생아를 안아 젖을 물리며 인간이 포유동물이란 개념을 온몸으로 느꼈다. 포유동물, 어미가 제 젖으로 새끼를 먹여 기르는 동물. 나는 동물이었다.


먹는 것도 힘에 겨워 잠들어버리는 3키로대의 생명체


아이가 얼굴을 내 가슴에 비비며 열심히 젖을 빠는 모습은 분명 사랑스럽다. 온몸의 힘을 짜내 살기 위해 먹는 아기의 애처로움에 사랑스럽다가 귀여우면서 안쓰럽고 슬펐다. 아이가 슬프고 내가 슬펐다. 내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무엇인가를 아이가 게걸스럽게 가져간다는 감각. 다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상실감. 그건 빙하에서 얼음이 조금씩 부스러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얼음과 눈으로 된 길을 걷고 있었는데 눈 앞에서 몇몇 길이 금 가고 부스러지는 걸 손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이제 저 길로는 갈 수가 없겠구나.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점점 좁아지고 끊어진 길 앞에서 새까만 크레바스를 내려다보며 꿈속의 나는 울었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는 아이의 미소를 보며 나는 확신한다. 나를 조금 잃고 너를 얻은 기쁨은 치환 불가능하다.


나 자신보다도 소중한 존재


다만 ‘엄마라면 아이에 대한 사랑만 느껴야지’ 등의  성급한 일반화를 반박하기 위해 고백한다. 그때 나는 사랑만으로 가득 찬 신화 속 엄마가 아니었다. 사랑 말고도 동시에 느꼈던 수십 가지의 감정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백일 간 모유수유를 하면서 동물로 전락한 나를 우울하게 만든 상실감은 분명 존재했다. 모유는 당연히 중요하고 나도 가능한 오래 내 것을 주고 싶었으나 나 자신에게도 아이에게도 강요하지 않았다.


모유의 신화화는 각양각색의 엄마들을 뭉뚱그려 섣부르게 신으로 추앙한다. 엄마는 대단하지만 신은 아니다. 엄마니까 이런 건 당연하다는 의무감은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50일 지나 모유 직수를 거부하는 아이 앞에서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괴롭혔다. 젖을 빨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아 떼를 쓰며 우는 아이가 미웠다. 수유 쿠션을 집어던지며 아이에게 화를 내는 내 모습을 발견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놈의 모유수유 때문에 아이와 무의미한 싸움을 할 순 없다. 백일 넘어 완강히 분유를 고집하는 아이의 뜻을 존중하고 직수를 중단했다. 그제야 배부른 아이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워진 식사 시간


수많은 엄마들이 존재하고 각자의 이야기는 눈 결정체 모양만큼 다르다. 엄마라면 자연출산으로 끝까지 완모하는 게 당연하며 그 이외의 사연은 비정상으로 치부하는 은근한 시선이 두렵다. 타인을 함부로 일반화하지 않는 태도, 지금 쓰는 장편을 서투르게 요약하자면 그런 태도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아닌지 모르겠다.


꿈속에서 나는 쌍쌍바를 혼자 양 손에 쥐고 먹고 있었다. 조만간 아이와 나 하나씩 나누어 먹으며 손 잡고 길을 걷는 꿈을 꾼다. 아이는 사랑을 먹고 오래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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