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과 시인 백석
수백 번을 읽었어도 마주치면 또다시 정독할 수밖에 없는 시가 있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시. 임용고시 공부를 하다가, 수업 준비를 하다가 자습서에서 교과서에서 이 시와 눈이 마주치면 모든 걸 내려놓고 읽게 된다.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시작부터 모든 걸 잃은 한 사람이 '굳고 정한 갈매나무'까지 도달하는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내겐 이 시가 나의 갈매나무였고 가슴속에 굳고 정한 나무 한 그루 가진 이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작년 두 달 근무했던 학교에서 백석의 시 <모닥불> 수업 준비를 하다 시인이 96년도에 돌아가신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랐다. 62년도에 북에서 발표한 동시 <나루터>를 마지막으로 북한 문단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졌다. 30년대의 훤칠했던 백석 사진만 보다 80년대 북에서 찍은 사진 속 노인이 된 그의 표정은 알 듯 말 듯하다. 59년에 숙청당해 집필권을 박탈당하고 삼수군(삼수갑산의 그 삼수)이라는 산세 험한 외지로 추방당한 사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젊은 시인이었던 그는 만약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32쪽,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하지만 그는 불행 속에서 시를 쓰지 못했고 시를 쓰지 못해 사랑을 증명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그의 시를 윽박질렀고 시를 박탈했다. 그는 왜 북을 선택했을까? 그의 고향은 평북 정주였고 가족이 모두 북에 있었으니 월북을 했다기보다 북에 남았다고 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과 전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의 격정적인 한반도 역사 속에서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하는 건 남과 북 모두 비슷했으나 그가 사랑한 것들은 북의 사회주의 공화국과 맞지 않았다. 그의 시는 그가 살아야 할 세계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162쪽, 새로운 시들은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였다. '우리는 자랑한다 조선 로동계급의 이름으로/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기치를/그 기치 아래 손잡아 떨친/무진하고 무적한 위대한 힘을!'이라고 노래하고, 또 '나는 다시금 느낀다./로력의 성과가 얼마나 큰가를/영웅의 땅 이런 나라에 산다는 행복/심장 속에 싱싱 푸르러감을'이라고 외치는 시들. 거기에 가무락조개, 나줏손, 귀신불, 이랑, 양지귀, 개포가 같은 말은 들어갈 수 없었다.
소설은 백석이 평양 노어 번역 및 아동문학분과에서 숙청당해 삼수로 쫓겨난 58년에서 59년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주의는 그가 '올바른'시를 생산하지 않고 부르주아적 잔재가 남았다는 이유로 시인으로서의 백석을 파괴했다. 전염병 환자가 나온 집을 아예 불태워버리는 당의 '위생사업'은 불순분자들과 그들의 책과 그들의 생각을 전부 불사른다. 그 불꽃에 백석의 '잘 길들여진 돼지처럼 순하고, 남국의 산록같이 보드라운 것들'(185쪽)도 하나 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삼수의 사무실에서 그는 노트에 시를 쓰고 종이를 찢어 난로에 불태운다. 쓰고 태우고 쓰고 태운다. 그가 사는 세계에서 허락되지 않은 시들이 불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연약하고 보드라운 시어들이.
-190쪽,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지금의 선택이 어떤 미래를 가지고 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선택 이후의 삶 속에서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유를 따져보는 일만 가능하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171쪽) 삶은 우리에게 예지가 아닌 해석만을 허락한다. 왜 통영의 그녀를 절친에게 빼앗겼는지, 왜 남으로 가지 않았는지, 왜 당이 쓰라는 대로 시를 쓰지 않았는지, 그는 슬퍼했을 것이고 한탄했을 것이고 부끄러워하고 어리석음에 눌려 죽을 수밖에 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달빛을 보고 무심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30년의 세월을 시인이 아닌 양치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조용히 그의 삶에서 벼랑까지 쫓긴 그 해를 되돌아보며, 연약한 것을 사랑하는 시인에게 한 마리 어린 양을 보낸다. 시를 빼앗긴 시인에게 삼수의 학생들이 쓴 동시를 읽게 한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실패한 자에게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하늘이 낸 거대한 불을 건넨다. 산 하나를 태우는 불 앞에서 그가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길 바라며. 부디, 당신이 당신의 시보다 불행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빨갛게 타고 타련다./일곱 해의 첫해에도/일곱 해의 마지막 해에도.'(백석, <석탄이 하는 말>)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