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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Mar 24. 2021

가운데땅에 다녀왔다

[반지의 제왕]과 함께 한 3월

20년 전 열다섯 살의 내가 신이 잔뜩 난 얼굴로 극장에 들어선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반지의 제왕:반지 원정대>가 나란히 걸려 있던 2001년은 판타지의 한 해였다. 해리 포터는 영화를 보기 전 문장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다. 반지의 제왕을 본 뒤 황금가지판 [반지의 제왕] 원작 소설을 샀다. 열 페이지 정도 읽고 처박아놨다가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이 개봉한 2003년까지 힘겹게 한 권 한 권 독파했다. 몇몇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지만 중학생 꼬꼬마가 읽기에 원작은 영화에 비해 지루하고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는 것 같았다.


20년 뒤 아르테 출판사에서 [반지의 제왕] 새 번역 양장본 한정판 세트가 출간되고,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최초 4k 리마스터링 버전 재개봉 소식이 떴다. 예약 구매한 책이 먼저 나오고 재개봉 전날까지 세 권을 연달아 읽었다.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엄청난 작품을! 20년 만에 나는 톨키니스트가 되었다.


지도를 짚어가며 읽는 맛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줄거리는 몰라도 골룸이나 절대반지 같은 건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사우론이라는 악한 존재가 가운데땅(영화 번역은 중간계)을 지배하기 위해 절대반지를 만든다. 이 반지는 겉보기에 평범한 금반지처럼 보이지만 한 번 보면 소유자의 욕망을 자극하여 타락시키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 영화로 처음 봤을 때 저 반지가 뭐라고 저러나 시큰둥했다가 원작을 다시 읽고 영화를 보니 진심으로 무서운 물건임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원작에서도 모든 반지를 지배하는 절대반지의 존재감을 몇 번이고 강조하고, 영화에서도 반지 스스로 속삭이며 유혹하는 목소리와 쉽게 떼어낼 수 없는 무게감의 연출, 유혹에 흔들리는 인물들의 연기 등이 어우러져 절대반지의 공포스러운 속성을 형상화한다.


절대반지는 '욕망'이다. 절대반지는 소유자의 욕망을 자극하여 지배하고, 욕망에 굴복한 소유자는 서서히 타락한다. 보통의 인간은 나즈굴과 같은 반지 악령이 되어 사우론에게 즉각 반지를 바치러 달려갈 것이고 요정이나 간달프 같은 위력적인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는 반지의 힘을 사용해 사우론과 비슷한 또 다른 '악'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래서 간달프는 절대반지를 만지는 것조차 거부했고, 요정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갈라드리엘도 절대반지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절대반지가 자극하는 욕망이란 게 꼭 악한 의도만 있는 게 아니다. 반지 원정대의 일원인 보로미르가 가장 먼저 반지의 유혹에 굴복한 건 '곤도르의 재건을 위해 반지를 쓰고 싶다'는 선한 마음 때문이었다. 사우론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반지를 쓰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는 사우론을 대체한 다른 악이 된다. 절대반지의 유혹 앞에서 갈라드리엘은 '암흑의 군주 대신에 밤과 같이 무서운 여왕을 세우는 셈'이라 단언한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해도, 악은 악이다. 악은 이용할 수 없다. 악은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새삼 다시보이는 프로도(의 미모)


절대반지의 유혹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며 이를 파괴할 수 있는 반지의 사자로 호빗, 가운데땅의 종족 중 가장 약하고 작은 종족인 호빗족의 프로도가 선택된다. 사실상 [반지의 제왕]은 호빗의 모험 이야기다. 담배와 식사, 술 이외에 큰 욕심이 없고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호빗은 소설의 중심이자 톨킨이 전달하고자 한 주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악에 대한 저항성이 가장 강한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맡는다. 영화 속 프로도의 꽃미모에 홀려 어린 나이에 고생하네, 싶지만 사실 원작 설정상 프로도가 반지를 가지고 샤이어를 떠날 때 50세가 넘는 중년이다. 처음에 영화를 볼 때 프로도가 우유부단해 보이고 자꾸만 사고를 치고 다녀 이런 애가 저렇게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다녀도 되는지 의심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실제로 반지의 힘 때문에 자주 쓰러지긴 한다...) 연약한 호빗이 전 세계의 운명을 떠맡고 있다니?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는 프로도가 가진 강인함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물론 큰 화면으로 시원시원하게 펼쳐지는 전쟁 씬은 여전히 가슴 벅차고 흥분되었다. 20년 전 지루하다 여긴 프로도와 샘, 골룸이 모르도르로 향하는 여정이 새롭게 보였다.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되는 절대반지의 끊임없는 유혹과 고통이 영화에서 프로도의 눈빛과 표정 연기로 생생하게 형상화된다. 보면 볼수록 주인공의 강철 멘털에 감탄하면서 만약 내가 반지를 갖게 되었다면 신나게 끼고 다니다 한 달도 못 버티고 반지 악령으로 타락해 사우론님께 갖다 바치러 냅다 달려갔을 것이다.


새삼 다시보이는222 골룸(의 고뇌)


절대반지를, 나의 욕망을 나는 이겨낼 수 있을까? 프로도 역시 운명의 산에 간신히 가서는 최후의 순간에 실패한 게 아닌가? 절대반지에 굴복한 프로도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아 용암 속에 떨어진 건 골룸이니까. 하지만 골룸이 거기까지 프로도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프로도가 골룸의 목숨을 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반지에게 지배당한 골룸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신과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골룸을 동정했기 때문에 프로도는 골룸을 죽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골룸이 반지 파괴의 과업을 완성시킨다. 프로도의 '선'이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소설도 영화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보고 즐기느라 풍요로운 3월 한 달이었다. <두 개의 탑>과 <왕의 귀환>을 연이어 본 뒤 극장 밖으로 나오니 자정이 넘었고 상점들은 전부 닫혀 있었다. 텅텅 빈 막차를 타고 가며 영화 속 장면들과 소설 속 대사들을 떠올리고 곱씹었다. 아직 가운데땅을 떠나 회색 항구의 배를 탈 준비가 안 됐다. 30주년 기념 재개봉도 하겠지? 그때는 VR 같은 걸로 기기에 연결해 직접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 관람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영원히 가운데땅에 머물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않다. 역시 나는 절대반지를 가질 수 없는 모양이다.



ps1. 새삼 영화가 원작의 방대한 타임라인을 귀신같이 압축해 정리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영화에서 삭제된 원작 초반의 캐릭터 톰 봄바딜과 후반부 샤이어 전투는 아깝긴 하다. 소설의 낭만적인 모험극의 분위기를 살려 주는 톰의 존재는 흥미롭고 초토화된 고향 샤이어는 전쟁이 남긴 상처는 결코 잊을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ps2. 현재 아르테 출판사 버전 [반지의 제왕] 양장본은 전량 리콜이 결정되어 4월 교환을 앞두고 있다.


ps3.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동시에 볼 때 두 주연배우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20주년 기념으로 같이 화보를 찍었다 ㅋㅋ 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만든 소중한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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