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제이미슨의 [리커버링]과 술과 중독과 창작의 관계
1. 나는 이 글을 맑은 정신으로 쓴다.
사실 나는 절대 술을 마시고 글을 쓰지 않는다. 가끔 쓰는 음주 일기를 제외하고.
2. 한때 술을 잘 마신다는 걸 장점이자 특기로 떠벌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내가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나의 음주 신화를 기꺼이 승인했다. 사실 나는 취기가 오르면 술 마시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다. 과도한 음주가 남기는 두통과 울렁거림과 블랙아웃, 숙취를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취하기 위해 마신다기보다 술이 좋아서 마신다. 두어 잔이 가져다주는 감각의 확장, 모든 게 잘 될 것 같다는 낙관을 사랑한다. 딱 거기까지.
3. 44쪽, 나의 음주가 어떤 문턱-나는 다섯 번째 또는 여섯 번째 잔 밑에 어떤 실존적인 터널이 감춰져 있다고 상상했다-을 넘으면, 술은 정직해 보이는 어둠 속으로 나를 거꾸러뜨렸다. 마치 세계의 밝은 표면은 모두 거짓이고, 자포자기하듯 취한 지하 공간이야말로 진실이 사는 곳 같았다. 음주는 예술가를 도와 "진실과 단순성, 원시적 감정을 다시 한번 보게"해준다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주장은 잭 런던의 백색 논리를 명백한 핵으로 재해석해, 일단 술이 나머지 모든 사소한 관심사를 벗겨버리면 그 뒤에 남는 중요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4. 한창 소설 쓰기를 배우러 다닐 때 3과 같이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술꾼으로 유명했던 레이먼드 카버나 아침부터 취해 있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술이 내게 영감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과제 마감이 임박하고 초고가 잘 안 나올 때 맥주를 마시며 썼다.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방바닥이 말랑말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취해서 글을 쓴 적도 있었다. 다음 날 술이 깬 뒤 다시 읽어보니 엉망진창이었다. 알코올 향이 듬뿍 묻어난 글은 무의미했다. 취한 지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5. 중요한 것을 찾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것, 한 인간을 단숨에 불태울 수 있는 불꽃의 핵, 찰나의 순간 모든 걸 바꾸어 버릴 정도로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싶었다. 내 글이 그런 불꽃과 힘을 가지길 바랐다.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내 뒤로 술이 다가와 속삭인다. '네가 찾는 게 어디 있는지 나는 알고 있는데.'
6. 그날은 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릴 정도로 힘들었다. 모든 게 다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엉망진창이었다. 치우고 치워도 엉망이 된 집안, 뒤돌아서면 쌓이는 집안일, 악쓰며 우는 아이,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글과 상투적인 거절의 멘트와 함께 반송되는 원고들, 텅 빈 지갑.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시간은 겨우 정오였다. 지금 맥주 한 캔만 마시면 안 될까? 딱 한 잔만, 그럼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데. 나는 냉장고를 노려보았다. 두 시간 만에 겨우 잠이 든 아이와 쓰다 만 미완성 원고는 안중에도 없었다.
7. 그때 한 잔을 마셨다면,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은 네 잔이 되고 맥주에서 도수 높은 술로 바뀌었을 것이다. 낮부터 술을 마신 내가 부끄러워지고, 부끄러우니까 술을 또 마시고, [어린 왕자]의 술꾼처럼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나의 미래를 봤다. '오히려 나는 고통을 정신적 비료로, 미학적 목적을 지닌 어떤 것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나는 고통이 나를 복잡하게 만들고 심화시켜주기를 바랐다.'(93쪽) 이 고통은 모두 창작의 연료라고 정당화하는 나의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았다.
8. 그래서 마시지 않았다.
9. 472쪽, 평범한 갈망은 어느 시점에 병이 될까? 지금 내 생각은 이렇다. 갈망이 수치심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포악해졌을 때라고. 갈망이 자아를 구성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결핍으로 해석하기 시작할 때라고. 당신이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둘 수 없을 때라고. 그리고 다시 그만두기를 시도하지만 그만둘 수 없을 때, 또다시 시도해도 그만둘 수 없을 때라고.
10.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으로 넘어가는 한 작가의 자기 고백을 읽으며 나는 나의 평행우주를 엿보았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퍼마시면서 넘어지고 부러지고 상처가 가지고 온 고통이 창작의 연료라고 착각하는 나, 이제 글을 쓸 수 있겠다고 웅얼거리며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나,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나.
그녀는 썼다. 중독에서 벗어나 회복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고백했다. 술을 끊었다가, 완벽하게 음주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다시 마셨다가, 다시 끊었다가, 마시고, 단주에 성공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썼다. 술이 주는 창작력을 믿었던 수많은 알코올 중독 작가들의 이야기를 썼다. 술을 끊고 더 많은 글을 쓰게 된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중독에 매혹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지난한 회복의 과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11. 18쪽, 중독 이야기가 어둠-계속 깊어만 가는 위기의 최면성 악순환-이라는 연료로 달린다면, 회복 이야기는 흔히 서사적 느슨함, 건강함이라는 따분한 영역, 눈을 뗄 수 없는 불꽃에 딸린 지루한 부록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늘 파멸의 이야기에 마음을 뺏기곤 했다. 그러나 회복 이야기가 파멸의 이야기만큼이나 강렬할 수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12. 책을 가지고 단골 바에 갔다.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술을 마시는 곳에 알코올 중독에 관한 책을 가지고 간다니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내게 술은 중독의 대상이 아닌, 책과 함께 즐기는 취미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평행우주의 다른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한두 잔의 술로 삶의 채도를 충분히 올릴 수 있어, 다채롭게. 깨끗하게 치워진 집에서 아이는 평온하게 잠들었고 막혔던 글은 결말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중이야.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열심히 일한 일주일의 보상을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의 절제된 위스키와 내 영혼의 주파수와 딱 맞는 책 한 권과 고요한 장소.
처음 마셔보는 종류의 위스키에선 훈제 향이 느껴졌고 나는 바닷가 옆 숲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나무 한 그루를 떠올렸다. 숲을 다 태우지 않고도 그 한 그루의 나무가 내뿜는 연기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