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 재접근기 아기 육아 풍경
지금 이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아이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끈다. 내 손가락을 꼭 잡은 아이는 나를 나의 서재로 인도한다. 서재 안에 아이 장난감은 없고 아이는 그저 나를 보며 웃는다. 내가 알 수 없는 아이만의 놀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도대로 엄마를 움직이게 한 것이 기쁜지 모르겠다.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아이가 내 손을 잡는 이유가 자신이 원하는 게 있을 때라는 사실이다. 이제 아이는 냉장고 문이 열리면 뭔가 맛있는 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특히 밥을 다 먹은 뒤 엄마가 냉장고를 열어 아기치즈를 꺼내 주는 패턴을 깨달았다. 식사를 끝낸 아이가 아기의자에서 내려오면 내 손을 꼭 잡고 냉장고 앞으로 데려간다. '지금 나는 치즈를 원한다!'는 확실한 의사표현이다.
자아가 생기고 원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직 말이 트이지 않은 아기가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비언어적 표현을 사용한다. 부모의 손 잡아끌기, 뚫어져라 쳐다보기, 소리 내기, 울기, 울면서 머리 박기. 아이가 자아를 자각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아이는 하루 종일 울고 소리 지르고 손에 잡히는 건 다 던졌다. 하필이면 PMS시기와 겹쳐 나 역시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울음을 터뜨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출산 이후 얻은 가장 안 좋은 것 중 하나인 생리전증후군이 양 손에 칼을 들고 칼 위에서 춤을 췄다. 자신 안에 깃든 정체 모를 무언가에 쫓긴 우리는 3일 내내 울었다. 머리를 감으며 샤워기를 최대로 켜 소리를 숨기며 울며 나는 나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아이도 어쩌면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말을 못 해 직접 물어볼 순 없지만, 장난감 상자에 블록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울면서 장난감을 집어던지는 아이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달력을 보니 딱 18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생후 16에서 24개월 사이 유아는 엄마로부터 신뢰감과 소속감을 재확인하며 독립을 준비한다. 혼자 잘 놀던 아이가 갑자기 다리에 매달리고 안아 달라 떼를 쓰고 수시로 엄마를 찾는다. 7월 한 달은 내 지정석인 거실 식탁에 거의 앉을 수가 없었다. 사운드북을 누르며 몰입한 듯해서 노트를 꺼내 한 글자 쓰는 순간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놀이터로 나를 데려간다.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으면 싱크대와 나 사이로 파고들어 나를 떼어내기 위해 용을 썼다. 재접근기 개념을 알고도 급격한 아이의 변화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안아 주고 아이가 손을 잡으면 순순히 끌려가 주는 정도였다. 내 손을 잡은 작고 뜨거운 저 손에 아무런 목적이 없어 보여도, 내가 따라간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일 것이다.
아이가 원한다. 밥이나 잠, 뽀송한 기저귀 말고도 나의 확고한 애정과 관심을 원한다. 아이가 손을 잡아당겨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때 약간 귀찮으면서도 신기했다. 이토록 작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욕망의 존재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뒤에 숨은 그 무엇이 경이로웠다. 이전까지 아이가 살아 있는 인형처럼 느껴졌다면 비로소 한 명의 인간처럼 보였다. 독립된 이야기를 가진 한 명의 어엿한 인간.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는 저마다 각자의 욕망이 있고, 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그 욕망은 갖은 방해물로 인해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의 이야기가 생긴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7월엔 예고 없는 소나기가 자주 쏟아졌고 코로나 확진자 최대치를 매일 갱신했으며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재접근기와 PMS 폭풍이 한바탕 지나간 뒤 급 평화가 찾아왔고 아이도 나도 울음을 멈췄다. 엄마를 옆에 두고 방긋 웃으며 에듀테이블을 두드리는 아이를 보며 따라 웃었다. 두 번째 장편소설까지 끝을 낸 뒤 새로 떠오른 두 개의 아이디어를 양 손에 하나씩 쥐고 만지작거렸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면서도 첫 문장을 쉽게 쓸 수 없었다. 쓸 생각은 있고? 이미 완성된 원고들은 끊임없이 출간을 거절당하고 어떻게 고치고 써야 할지 방법을 알 방법이 없었다. 마감이 없는 무명의 작가가 계속해서 글을 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 나의 욕망,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겠지.
육아를 제외한 다른 일에 손 놓은 채로 한 달을 멍하니 보냈다. 브런치도 쓰는 둥 마는 둥 책만 조금씩 읽으며 하루 종일 에어컨을 가동한 집에서 꼼짝 않고 창밖의 폭염을 관망했다. 아이가 멍한 나를 끌고 자신의 책장 앞으로 데려간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을 꺼내 강아지가 그려진 페이지를 펼친다. 내 손을 끌어당겨 강아지를 가리킨다. 멍멍! 인간 사운드북이 되어 강아지 소리를 내자 활짝 웃는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명쾌하다.
나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고 나도 모르는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히 가르쳐 주면 좋겠지만 내 손을 움직이는 건 오롯이 나의 의지에 달렸다. 보통 내가 욕망하는 것은 지금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다. 내 힘으로 열지 못하는 냉장고 안의 치즈, 아직 읽을 수 없는 그림책 속 이야기, 몇 번을 확인해도 부족한 엄마 아빠의 애정, 그때마다 아이는 움직인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결국 내가 원하는 건 한 편의 잘 쓴 완성된 소설이고 그걸 가지기 위해 나는 나의 손을 움직여야 한다. 축 늘어진 내 손을 잡아당겨 노트 위에 둔다.
가지지 못한 것들이 우리를 밀고 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면서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많이 원하자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고 마음먹었다. 왜 안 되겠는가? 어쨌든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면 새드엔딩이다. 원하는 걸 가지거나, 가지지 못하거나. 그게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엔딩이 찾아오면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원하는 걸 얻는지 얻지 않는지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는다. 인생 역시 이야기라면 마찬가지리라.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