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에세이 혹은 소설 창작 일기, 그 사이에서
두 줄로 된 다리를 건너고 세상이 바뀌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출산을 한다. 책을 읽다가, 미역국을 먹다가, 애인과 마주 앉은 식당 안에서, 한강대교를 반쯤 건넌 140번 버스 안에서, 나의 아이들은 태어난다. 다리 위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해가 지며 붉게 물든 강을 배경으로 느리게 걷고 있다. 왜 그녀는 다리를 다리로 건너가는 중인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노트를 꺼내 그녀에 대해 첫 문장을 쓰면서 소설의 주인공을 잉태한다.
태어난 주인공들이 모두 소설로 완성되진 못한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12년부터 지금까지 썼던 수십 권의 노트에 신생아의 상태로 잠들어 있는 그 혹은 그녀들이 수두룩하다. 다리 위 그녀는 무사히 자라 한 편의 소설로 컸다. 140번 버스를 타고 서울 한 바퀴를 돌다 한강대교 전망 카페 역에서 내려 이슬비를 맞으며 다리를 건너는 그녀는 단편 <140번 버스의 아이들>에서 살게 되었다.
첫 소설집의 출간일이 확정됐던 2019년 5월, 나는 길을 걷다 에피파니 Epiphany를 경험했다. 나는 이 단어를 나중에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다 알게 되었다. 원래 뜻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한 날로 나타남, 출현이라는 의미다. 조이스는 이를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서 삶의 중요한 무엇인가를 갑자기 깨닫게 되는 순간으로 표현한다. 그날 나는 길을 걷다 가벼운 멀미 증상을 느꼈다. 숙취나 소화불량, 과식으로 인한 울렁거림과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다 갑자기 멈춰 섰다. 이건 멀미가 아니다, 이 현기증은...
나는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다음 날 아침 첫 소변을 받았다. 두 줄이었다.
내가 느낀 건 멀미가 아닌 초기 입덧이었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운 상태는 수많은 증상을 포함하는데 그중에서 정확히 임신을 직감했던 그날의 내 본능은 ‘출현’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다. 이 아이는 우리 앞에 출현했다. 임신 테스터기의 두 줄로 간명하게 그려진 다리를 건너 저 쪽에서 이쪽으로.
나 역시 일종의 다리를 건넌 셈이다. 나의 몸, 나의 상식, 나의 세계가 모두 바뀌었다. 입덧은 뒤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나의 멀미 증상이었다. 첫 책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최종 교정본을 확인하고 책이 나올 때까지 나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침대나 소파에 누워 지냈다. 하루 한 끼는 꼭 밀가루를 먹던 내가 칼국수 사리면을 넣은 국물에서 밀가루 냄새가 역해 입에 대질 못했다. 밥은 괜찮을까 하여 밥솥에 밥을 안치는데 증기 배출이 시작된 순간 온 집안에 퍼지는 밥 냄새에 황급히 안방으로 도망쳐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입에 달고 살던 커피는 온통 쓴 맛 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내 몸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었다. 초음파에서 엄지 하나 크기만 한 검은 동그라미, 실제 크기는 1cm도 채 되지 않을 세포인 네가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엄마-소설가라는 존재는 가능한가
임신을 확인한 뒤 나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첫째, 임신과 출산 이후로도 꾸준히 소설을 쓴다. 둘째, 임신 및 출산과 육아 일기를 쓴다. 육아와 소설 쓰기를 병행하겠다는 가시밭길을 향해 한 발짝 떼며 이 여정에 어떤 제목이 어울릴지 고민했다. 육아, 소설, 둘 다 하니까 몽땅 넣어 버리자, 약간의 어그로성도 첨가해서, ‘육아보다 쉬운 소설 쓰기’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둘 다 잘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한 나의 미래는 점점 어려워졌다. 가장 큰 문제는 글을 쓸 객관적인 시간 확보의 어려움이었다.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스마트폰 노트 어플로 마른 수건에서 물방울을 쥐어짜 내듯 한 줄 두 줄 힘겹게 썼다. 아이가 잠들면 침대에 눕힌 뒤 고민할 틈도 없이 노트와 펜을 챙겼다.
육아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아이에게 나는 부모라는 권위를 가지고 먹는 것, 입는 것, 말과 행동, 생활 습관과 건강 상태를 선택하고 가르치며 통제할 힘이 주어진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방 안 온도와 습도를 칼같이 맞춰도 아이 피부에 태열이 올라올 수 있다. 3시간 텀을 지켜가며 순조롭게 수유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평소의 반만 먹고 혀로 밀어내고 울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육아의 주체는 부모인 ‘나’와 아이 ‘너’로 구성되는 2인칭의 복잡한 구성이다. 나는 끊임없이 너를 고려하고 너를 신경 쓰며 일해야 한다. 부모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엄마 소설가라는 존재가 가능할까? 그럴듯하게 제목까지 정해 놓고 끝없이 불안했다. 둘 모두 잡아 보려다 둘 다 놓쳐버리지 않을지, 애초에 터무니없는 나의 망상이 아니었을까?
작가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연필과 약간의 종이야. 그거면 충분해. 자기 홀로 그 연필을 책임진다는 걸, 그 연필로 종이 위에 쓴 것을 자기 홀로 책임진다는 걸 알고 있다면 말이지. 즉, 자기가 자유롭다는 걸 안다면 말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건 아냐.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어쩌면 정말 조금밖엔 자유롭지 못할지도 몰라. 어쩌면 간신히 얻어낸 짧은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글 쓰는 여성이 되어 머릿속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오로지 이 순간에만 자유로울지도 몰라. 하지만 이때만큼은 책임을 지는 거야. 이때만큼은 자율적인 거야. 이때만큼은, 자유로운 거야.
- 어슐러 르 귄, [분노와 애정]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 나는 자유롭다. 인물의 탄생부터 결말까지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무한대로 상상한다. 아기 침대 옆에서 나는 내 주인공을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보내 좁은 골목길을 걷게 할 수 있다. 분유를 타며 머릿속으로 내 인물이 브라우니를 먹으며 마음대로 수다를 떨게 내버려 둔다. 배부른 아이가 잠이 들면 노트를 펼쳐 방금 머릿속 대화를 받아쓴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쓸 수 있었다. 자유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 나는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2년 간 두 편의 장편소설 원고를 완성했다.
여러 개의 삶이 가능한 방법
육아와 소설 쓰기는 비슷한 점도 있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내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쓴 소설 속 주인공은 나와 같이 노량진에서 임용 준비를 하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다음 소설의 주인공은 담배를 피우며 취직을 준비하는 남성이었다. 첫 장편소설의 주인공은 20대 후반 소설가 지망생 여자, 30대 초반 크로스핏 트레이너 여자, 같은 나이의 임용 기간제 남자로 나와 비슷하면서 내가 아닌 인물들이 자리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되는 경험은 자율 주행하는 스포츠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느낌이었다. 즐겁다는 소리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내가 아닌 한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안에서 나의 절반을 가지고 태어난 이 아이는 왜 내가 아닌가. 나를 닮았으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의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쌓여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났다.
나의 자아는 내 몸을 넘어서지 못하고 나의 삶은 단 한 번만 주어지지만, 아이를 키우고 소설을 쓰면서 나는 여러 번 살아갈 수 있다. 중학생의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요즘의 10대 학생들로 살아 보고, 두어 걸음발을 떼는 데 성공한 아이의 미소를 보며 우리는 언제 걸음마를 했을지 과거의 시간을 되새긴다. 겉으로 보기에 집에 가만히 앉아 아이를 안은 여자처럼 보이지만, 머릿속으로 동시다발적인 삶을 진행하느라 몹시 바쁜 사람이 여기 있다.
이 책은 상상 속에서 등장인물을 낳다가 현실 세계에서 진짜 인간을 낳은 어떤 여자의 고백이다.
인간이 인간을 낳고 키우는 일의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다.
양 손에 인간과 인물 하나씩 안고 앞으로 나아간 시간의 기록이다.
익숙지 않은 모유수유 연습으로 고단했던 조리원 생활에 가장 큰 활력이 되어 준 영화 <극한직업>의 명대사를 살짝 빌려 말해보자면 이렇다. 이 사람은 엄마인가 소설가인가, 엄마-소설가 인사드립니다. 이것은 육아 에세이인가 소설 창작 일기인가, '육아보다 쉬운 소설 쓰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