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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Feb 03. 2020

잠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새벽 수유가 끝난 뒤


새벽 하늘은 이상하다


새벽 4시, 4시간 정도 자다 일어나 한바탕 수유와 기저귀 갈기를 마치고 다시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는다. 아이와 남편은 잠이 들었다. 잠은 나만 남겨두고 둘을 데려갔다.


나는 잠이 무섭다. 잠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가 아기였을 때 우유만 먹으면 눕자마자 잠들었다고 한다. 지금 나와 잠은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가 크게 싸운 뒤 인사도 하지 않는 반 친구 같은 관계다.


언제부터 잠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렸을까? 20대 중반 고시원에 거주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 잠은 나를 외면했다. 책상 아래 다리를 집어넣고 누워야 하는 방 안에서 잠 대신 세상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우울이 나를 찾아왔다. 자는 일도 서툰 네가 시험은 제대로 치겠니? 허옇게 창이 밝아 오고 힘겹게 눈을 감으면 발목만 간신히 찰랑거리는 얕은 잠 속에서 시험에 불합격하는 꿈이나 검은 그림자가 벽지에 스며들어 나를 내려다보는 악몽에 시달렸다.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아이는 다행히 잠과 친한 것 같다. 양껏 배를 채우고 새 기저귀를 갈아준 뒤 침대에 눕히면 알아서 눈을 감는다. 수유 시간이 지났는데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아 탈수가 걱정되어 일부러 깨운 적도 있다. 색색거리며 자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며 램 수면 상태를 알린다. 감긴 눈 안쪽 어떤 꿈이 상영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직 색채를 식별하기 전이라 한 편의 흑백영화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


나만 제외하고 모두 잠든 새벽


임신 막달 오랜만에 찾아온 불면증이 당황스러웠다. 세 시간 간격으로 먹어야 하는 신생아를 위해 몸에서 엄마를 준비시키는 호르몬이 나온다나. 임신 초반 일시적인 화해를 청하며 무조건 누워 쉬라던 잠은 다시 나를 떠났다. 2-3시간 간격으로 아이의 울음소리에 맞춰 잠을 끊어 잔다. 바로 이 앞 문장과 지금 이 문장 사이에 아이가 칭얼거렸고 나는 아이를 토닥이며 슬며시 도망가려던 잠을 달랜다.


나랑은 죽을 때까지 싸워도 돼. 어차피 죽으면 영원히 자겠지. 우리 아이랑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불면의 밤에 썼을 그의 원고


내 몫의 잠까지 가져간 아이는 깊이 잠들고 나는 잠이 떠나간 빈자리를 책으로 채운다.  


잠을 잘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이는 지금 내가 깨어 있기에 하는 생각이다. 밤은 나를 숨 막히게 짓누르는 말없는 꿈의 이불 뒤에 버티고 선 거대한 무게다. 내 영혼은 소화불량에 걸렸다.
이 불면이 지나가면 언제나 그렇듯이 새날이 올 테고, 언제나 그렇듯이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나만 제외하고 모두 잠들어 있기에 행복하다. 나는 잠들려는 엄두도 못 내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존재하지 않는 괴물의 커다란 머리들이 나의 밑바닥에서부터 혼란스럽게 솟아오른다. 그것은 심연 속에서 올라온 동양의 용이다. 말도 안 되는 붉은 혓바닥을 가진 용이 나의 삶 없는 인생을 죽은 듯한 눈길로 응시하지만, 내 인생은 그 눈을 마주 보지 않는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243번)  


아기보다도 잠에 서툰 나는 잠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대신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잠든 아이와 남편의 얼굴에 드리우는 광경을 응시한다. 방 안이 심해의 빛으로 깊게 가라앉는다. 갈 곳 잃은 꿈들이 잠든 이를 찾아 헤엄쳐 사라지고 나는 홀로 불면의 압력에 짓눌려 천천히 감압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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