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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10. 2021

엄마라는 클리셰 깨기

긴 머리를 자르고

*의외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5 재난지원금을 받고 가장 먼저  일은 미용실 예약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되는 2018 7, 산꼭대기의 고등학교 시간강사로 일하다 홧김에 머리를 자른  3 만이었다.  무렵 나는 자주 화를 냈고  분노가 더위 때문인지 부당한 대우 때문인지 종잡을  없어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충동에 휩싸여 미용실에 쳐들어간 나는  번도 시도한  없는 스타일을  보고 싶었다. <오징어 게임> 주인공 훈이  모든 일을 겪은 끝에 파격적으로 선택한 붉은 머리처럼, 나는 충동적으로 숏펌을 했다.


3년 전의 나야 안녕?


   임신을 확인했을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정도로 무럭무럭 자랐다. 나를 보러  엄마는 나중에  나오면 머리 감기 힘드니까 저번처럼 짧게 잘라버리라고 했다. 이미 아이를 낳은 지인들은 출산  머리가 많이 빠질  있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다들 말을 보탰다. 머리카락이 길면 힘들다고. 누가? 엄마가.


엄마라는 이미지라 하면 짧은 펌이 뒤로 묶은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이유식 밥풀이 묻은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때늦은 밥을 먹는 모습이 쉽게 떠오를지 모른다. 희생, 숭고, 모성의 위대함 같은 단어들이 관광지의 촌스러운 오색 조명처럼 비추고 있는 이미지들. 이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미지, 캐릭터, 스토리를 '클리셰' 한다. 전쟁터에서 여자 친구의 사진을 꺼낸 군인은 반드시 사망하고, 우연히 만난 남녀는 투닥거리다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해야만 하고, 영웅은 악당을 물리쳐야만 한다.


최근 화제의 중심인 드라마 <오징어 게임> 보면 클리셰를 쉽게 이해할  있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데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 우연히 게임에 참여하게  주인공, 게임이 진행될수록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물들 사이에서 선함을 잃지 않으려는 캐릭터, 막판의 반전. 진부해 보이지만  쓰면 보기가 편하다. 익숙하니까.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클리셰의 기기묘묘함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클리셰는 돌파해 하는 것이다.

나는 클리셰를 깨고 싶었다.

엄마라는 진부한 이미지가 나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두껍고 긴 방어막을 쳤다. 내 머리카락으로.


"나, 머리 안 자른다!"


그리고 3년이 지나 미용실에 간 내 머리카락을 실장님이 노란 고무줄로 묶은 뒤 가위로 단번에 잘라냈다. 종이가방에 담긴 내 머리 타래는 튼튼하고, 새까맣고, 엄청났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출산과 육아도 뽑아내는 데 실패한 내 머리카락은 가장 나다운 것이었다. 인생 첫 매직을 하러 갔을 때 미용실을 마비시켰던 엄청난 숱과, 머리카락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 없는 굵기를 자랑하는 나의 머리 타래는 어떤 생명의 기운마저 느껴졌다.


"너, 나 안 자른다며...?"


머리조심!!!


허리까지 내려오는  많은 머리는 세척과 건조에 거의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팔랑이는 이미지를 생각했으나 하루 종일 묶고만 다녀 상투를 틀어야 했다. 머리카락 관리가 힘들어 옷을 고르고 밥을 차려먹을 시간이 없었다.   머리가 클리셰로 전락했다. 길고, 무겁고, 미련한 클리셰. 나는 무엇을 깨려  걸까? 엄마라는 클리셰를 깬다는 클리셰 속에 갇혀 무거운 가채를 얹고 다니는  뒷목은 뻣뻣해지고...


클리셰는 안정적인 틀을 제공한다. <오징어 게임>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유  하나가 클리셰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시청자들에게 빠른 몰입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인생 막장에 몰린 이들이 상금을 얻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다' 그런데  게임들이 어린 시절에 하던 단순한 것들이야, 근데 게임에서 지면 죽어, 근데  게임 배경은 독특해, 거기서 누가 살아남을지,  게임을 주최한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보다가 밤을 새우는 것이다.


나는 약간의 클리셰를 허용하기로 했다. 단발머리로 가볍게 다니면서 씻는 시간을 줄인다. 자주 입는 옷을 정해 두고 깨끗이 세탁한다. 아이 밥을   같은 메뉴로 같이 먹는다. 쓸데없이 낭비되는 에너지를 아껴 육아와  일의 질을 높인다. 육아도 일도 모두 놓치지 않는 워킹맘의 클리셰, 숭고미나 희생 따위의 불필요한 스티커는 싹 떼어내고 단순하게.


긴~머리를 자르고~~


궁금함에 줄자로 측정한 내 머리카락은 37cm였다. 다음 날 택배로 어머나운동본부라는 머리카락 기부 단체에 내 몸의 일부를 떠나보냈다. 어디서도 지지 않는 내 머리는 소아암 환자들의 자존감이 될 것이다. 나눔과 기부라는 클리셰는 몇 번이고 반복되어도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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