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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O Jul 17. 2022

‘루소’의 <고독한 몽상자의 산책>을 읽고

어린 내가 루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 같군.

나는  책을 통해서 루소가 말하고 있는 행복은 무엇이며, 우리가 그의 행복을 공감할  있는지에 대해서 탐구하려고 한다.


 루소의 행복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는 그의 불행을 먼저 살펴보아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역경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순간 사람들에 의해 괴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루소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비난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적어도  명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동맹은 예외 없이 전체적이고 영구적이었다. 그는 지상에 오직 혼자인 자신을 깨닫는다. 결국 그런 모든 수고를 체념하고, 군말 없이 자기 필연의 멍에를 지는 법을 배운다. 그는  이상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온갖 불행의 원인을 무조건적인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불행의 원인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외부적인 일들의 원인과 수단들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게 된다. 이처럼 역경은 그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루소는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평온하고, 고요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들이 없는 자연 속에서 그는 잠시나마 자신의 행복을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그의 행복은 외부에 의해, 언제 다시 불행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자신의 행복을 지속시키려고 하는가. 그는 자신의 무심한 본성을 이용한다.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을 철저히 무관심하게 여김으로써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식물채집에 몰두함으로써, 몽상에 빠짐으로써, 혹은 이미 자신에게 만족해 있음으로써, 외부의 것에 쉽게 무관심해질  있었을 것이다. , 몰입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외부적인 것과 차단되어 자신에게 집중할  있게 된다. 루소는 자신의 행복을 바로  몰입 상태에서만 순간순간 취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몰입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에 있다. 몰입의 순간이 깨지는 동시에 그의 행복 역시 보장받을  없게 된다.  순간 외부적인 요인이 혹은 무의식적인 동작이 그의 무심한 상태를 파괴하고, 그의 예민한 감각을 끓어오르는 분노로 휩싸이게 할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그의 행복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충동을 따른다고 한다.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모든 충격(고통) 그에게 점점 무디게 느껴질 것이고, 그것이 일으키는 강렬한 감정의 움직임도 줄어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의 충격(고통) 없으면,  움직임은 멈춘다는 논리이다. 이건 자신에게 고통을  새로운 술책이 사람들에게  이상 없다는 것을 굳게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믿음이며, 소망일 뿐이다. 새로운 고통이 어디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을 체험하기엔 인간의 삶은 너무 유한하다. 결국, 루소는  영원불변의 지상에서,  자신을 뒤흔드는 열정적인 본성과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돈단무심한 본성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그의 한계인 동시에 운명이다.


 루소의 말을 종합해 봤을 , 행복은 내부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한, 몰입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행복을 일시적으로 느낄  있다. 우리는  행복을 붙들려고 해서는  된다. 다만  행복이 사라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루소의 행복의 상태를 몰입의 상태로 보았기에 충분히 그의 행복을 공감할  있었고, 그의 한계 역시 유한한 삶을 가진 인간의 한계로 해석할  있었다. 나는 루소의 행복을 공감하면서도  가지 안타까운 점을 발견할  있었다. 그는 내부의 행복에만 몰두한 나머지 외부의 행복을 놓치고 있었다. 내부의 행복과 외부의 행복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화 속에 있어야 마땅하다. 만약 실제로 지상에 모든 사람들이 죽고 루소 혼자만 남는다면, 그는 과연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을 비웃을  있을까. 아마도 그는 그들을 그리워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그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그는 그들을 조롱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을 무시한 , 자신의 세계에만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 힘든 일이지만, 그들을 사랑으로 대했어야 했다.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고귀하게 복수하는 방법은 바로 그들을 용서하는 것뿐이다. 책을 덮은 지금  그가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을 용서했었더라면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몽상에 빠져본다.




그리고도 기억에 남는 구절


나는  마음이 내적인 감정들에 대해서 외적인 감각이 주는 영향력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외부로 드러나는 표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행복한 사람의 마음속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만족은  속에서, 태도에서, 말투에서, 행동에서 읽히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에게 전염되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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