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없는 날
퇴근시간이 다 돼서 영업회의를 마치고 사장이 돌아왔다. 영업부 김 과장에게 물어보니, “사장한테 겁나게 깨졌다”라고 한다. “과장님도 들어와서 압박을 같이 느끼셔야 하는데..”라고 덧붙였다. 거긴 내가 들어갈 곳이 아니지. 아무렴. 아무튼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사장이 해외 거래처 부사장 메일을 실수로 놓쳤는데, 부사장의 비서가 우리 사장에게 부사장 메일 읽었는지 직접 확인 메일 보냈다. 메일 내용은 “우리가 한국에서 기계 잘 팔고 SNS 잘하고 있어서 자랑스럽다. 칭찬해. 아주 칭찬해”라고 쓰여있었다. 말로만 칭찬할 뿐이다. 으레 그렇듯 칭찬 후에는 본론이 나오는 법. “너네 SNS에 올린 거 PPT로 만들어 줄 수 있니?” 원하는 것은 바로 이거였다. 사장은 “마케팅팀에서 페이스북에 올린 ‘행복한 동행’ 봤냐?”라고 나에게 물어보는데... 아뿔싸! 기억이 안 난다. 행복한 동행? 이게 뭐지?! 뭘 올린 걸 본 거 같긴 한데…’ 당황해서 그런지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최근에 페이스북에 안 들어가서 확인 못했습니다”라고 곧이곧대로 말해 버렸다. 그 순간 난 사장의 지랄 버튼을 누른 것이다. 요즘 매출도 개판인데 요놈 잘 걸렸다. 지랄 지랄 개지랄 분노 폭발해주시고요. 작은 것에 격하게 반응하는 쪼잔한 사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장이 갑자기 격하게 지랄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여차저차 사장의 화염이 지나가길 기다리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마케팅 조 대리와 나를 불러 해외에 이거 보내줘야 하니 준비해 보란다.
이 상황에서,
예전의 나였다면, 별것도 아닌 걸로 지랄 발광하는 사장을 욕하며 씩씩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라고 하면 더 안 하는 청개구리 심리로 내 자존심만 세우며 끝까지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반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변했다. ‘먹고살아야 한다’ 사장에게 공손히 퇴근 인사를 하며 “앞으로 페이스북에 자주 들어가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퇴근하는 길에 회사 포스팅에 ‘좋아요’를 마구 눌렀다. 심지어 사장이 올린 개인 포스팅까지 다 ‘좋아요’를 눌러줬다. ‘까짓 거 옛다 먹어라. ‘좋아요’ 누르는 게 뭐가 어렵나?’ 아무 생각 없이 누르면 된다. 에고를 버리면 사는 게 좀 더 편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