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하지만 걱정되는 회사, 남을지 말지 그것이 문제로다
이제는 영화에서 흔한 주제인데, 지구를 탈출해 새로운 곳에 테라포밍을 하려는 이야기를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얼마 전 봤던 미키17도 사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만약 지구에서 더 이상 살기가 힘든 상태라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주로 나가고 새롭게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가 살기에 충분히 괜찮은 상태라면 어떨까? 아마 대부분은 지구에 남으려고 할 것이다. 지금의 안락함이 좋기도 하고, 유한한 내 인생을 책임지기엔 이 행성이 충분하니 말이다. 이렇듯 지구의 상태를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생각보다 쉬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지구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어떨까? 살기 괜찮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면 말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배팅을 해야 한다. 지구에서 존버할 것인가, 미지로 도전할 것인가. 지구를 떠날지 말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직장인) 앞에도 이에 못지않은 중대한 고민이 있다.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내 남은 인생(커리어)을 걸 것인가, 아니면 나갈 것인가. 눈앞의 신호등에는 노란불이 들어와 있다.
불확실한 미래라도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있는 곳이 정체되었다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실제로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더 높은 연봉, 더 나은 환경, 더 큰 성장을 꿈꾸며 과감하게 퇴사를 감행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새로운 곳에서 성공을 거둔다. 나도 이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종종 꿈꾸기도 한다. (이직해서 연봉 10억 받고, 파이어족 된다는 내용의 애니 추천 좀 ㅋㅋ)
지금 회사는 내게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고, 그 덕에 안락함도 누리고 있다. 사람들도 좋다. 그런데 ‘나 자신이 이 회사에서만 통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여기서처럼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솔직히 자신이 없는 것 같다. 공채 지원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뭔가 패기가 없다. 자신감 결여와 함께 커지는 안주하고픈 마음에 ‘여기가 제일 좋아서 남는 거임’이라는 포장지를 씌운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뽐뿌가 지나간다.
그런데 점점 포장지가 벗겨져 간다. 걱정이 된다. 국가 기간산업이라서, 업계 최대 규모 회사라서 망할 일 없다고 자부하던 곳인데 개악되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는 ‘탈출이 지능순’이라고도 한다. 투자 실패로 회사는 점점 맛이 가서 신입사원도 느낄 정도인데(함정은 이미 신입사원을 안 뽑음), 쓸데없는 일만 벌이며 직원들을 쥐어짜는 느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차가 올라가고, 업무는 늘어나고, 부담과 피로가 쌓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길 떠나야 할까? 회사가 흔들린다고 해서, 나까지 흔들려야 하는 걸까?
이러면 또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성장 아닌가?’ ‘나 원래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인가?’ 사람은 늘 발전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를 향한 조급함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양쪽의 생각이 미친 듯이 싸운다. 탄탄한 논리가 있는 건 아닌데, 치열함은 100분 토론 이상이다. 이런 고민을 할 때면 지킬 앤 하이드의 홍광호가 떠오른다.
고민 속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관성’이다. 이 단어를 보면 뭔가 깨야 하는 대상처럼 느껴졌다. 변화는 늘 필요한 것이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관성이란 단순히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해 주는 방어막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급격한 방향 전환이 불러올 위험을 줄여주고, 충분한 고민을 할 시간을 벌어주지 않을까? 변화는 중요하지만, 모든 변화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고민 없이 던지는 도전이 정말 의미 있는 선택일까? 변화 자체에 대한 강박을 잠시 내려놓고, 그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미 주어진 환경과 지켜내야 할 일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너무 늦지는 않아야 한다. 신중함을 방패 삼아 정말 변화가 필요한 순간마저 놓치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변화에 대한 조급함 혹은 회피가 옳은 방향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게 하면 된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고민이다. 정답은 없고, 선택만 있다. 선택이 정답이었는지 여부는 다시 또 내가 하기에 달렸다.
(P.S. 퇴사 or 부서이동 당장 할 예정 전혀 없으니, 저의 지인분들은 걱정 말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