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 곳에는 내가 담겨있다.

03

by 고봉수

■ 한적한 카페에 앉아, 조용히 창 밖을 바라봅니다.


시선이 가닿은 그곳에, 싱겁게도 이렇다 할 무언가는 없습니다. 그저 나뭇잎이 흔들거리며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나뭇잎 사이로 퍼져나가는 빛의 산란 때문인지 아니면 무더운 온도가 만들어내는 여름날의 일렁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잔상은 하나의 사진처럼 어딘가에 남겨집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책을 테이블 위로 꺼내어 천천히 읽어 내려갑니다. 에스프레소의 샷을 내리는 소리와 나뭇잎이 흔들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종이 위로 펼쳐진 작가의 글을 따라갑니다. 한없이.


그러다 문득, 허공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아까처럼 무의식적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이제 무언가 다른 것이 담겨있습니다. 그건 빛의 산란도 그리고 여름날의 일렁임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에는 분명한 형태와 색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그 안에는 이제 '내가 담겨있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음,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요. 고봉수씨?" 라고 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그런 생각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정말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요?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이 바로 한적한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엇을' 봤는지 혹은 '어떤 이유로' 창 밖을 바라보았는지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떠올린 이유는 조금은 단순하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호흡과 함께 상상의 세계를 따라가고 공감하고 그리고 나름의 이해를 더 하면서 바라보는 저의 무뚝뚝한 시선은 어떻게 보면 제3의 관찰자로서 그를 천천히 따라갈 뿐입니다.


하지만, 시선의 피곤함을 느끼며 잠시 그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돌아온 현실은 어디까지나 제가 중심이 되는 그런 스스로의 세계입니다. 아마도 그 현실에서 저는 더 이상 누군가를 따라가야 하는 관찰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의 세계에 남겨져있던 그 잔상들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머리를 식히고 호흡을 가다듬는 모든 순간에 그 잔상은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가지며 덩그러니 놓여집니다.


그대로 이미지를 무시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거나 책을 잠시 덮고 친구와 통화를 하거나 혹은 짧게 산책을 다녀와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덩그러니 놓여진 이미지가 던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의미에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글 속에 있던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저 또한 작가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던집니다. 다소 원초적인 질문일 수도 있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부정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가 던진 그 시선의 기준은 그동안 시간을 들이며 쌓아온 스스로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과 모습이 작가와 꼭 닮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마음’일 것도 같습니다. 그만큼 서로의 세상은 그 시작점부터 달랐으니까요.


그래서 상상의 세계에서 잠시 나와, 바라본 현실의 시선에는 이제 제가 담겨있게 됩니다. 아마도 가득한 의문을 해결하고 또 적당하게 이해를 하고 싶어 안달이난, 그런 제가 담겨있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작가에게 의문을 던지며 제가 경험한 것들과 비교를 해보고 두 세계가 적당한 궤도를 가지며 공감을 하는지 계속 확인을 해나가는 그런 모든 과정이 책을 덮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혹은 짧으면 짧을수록 저는 그러한 두 세계를 알맞게 맞춰나가려 부단히 고민하는 중 일 겁니다.


■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시간의 축척에 대해서.

색은 경험을 담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같은 노란색이더라도 누구는 노르스름한 노란색을, 누구는 뜨거운 태양을 받은 샛노란 노란색을 떠올리는 것처럼요. 그건 아무래도 모두 다르죠.


끊임없이 던진 그 의문에 알맞은 대답을 찾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어휴 모르겠다. 그냥 일단 읽어보자, 나중에라도 알려주겠지." 하면서 포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물론 아주 친절하게 그 끝에 설명을 해주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제가 던진 의문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조용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경우도 꽤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일까?"


작가의 세계를 보면서 이런 의문이 생길 때, 그저 한 명의 관찰자로서 '그랬구나, 그렇기도 하구나' 공감하며 넘기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점입니다. 때로는 쿨하게 넘기는 것 또한 삶의 안정에 나름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런 확인의 과정이 바로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들여 쌓아 온 저의 세계와 작가의 세계가 충돌하며 만든 간격을 조금이라도 더 좁혀나가려는 그러한 과정이 바로 저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타협을 하며, 또 때로는 반박을 하며 충돌하는 두 개의 세계가 점차 그 간격을 줄여나갈 때 제가 가진 축적의 깊이(Depth)도 새로운 방향을 가지며 깊어질 것 같습니다. 이러한 깊이는 누군가에게는 성장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도약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과정은 '이해' 라는 측면에서도 꽤나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33살의 인생에서 저라는 사람 또한 그동안 제가 경험하고 쌓아 올린 시간의 축적을 통해서 한 단면을 만들고 다시 다른 면을 만들며 입체적인 모습으로 변해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그 선이 모여 면이 되듯이 이제는 그렇게 쌓아온 축적의 단면들을 다시 모아 '나' 라는 사람의 입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20대에 올 수도 있는 거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40대에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타이밍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축적의 과정이 만든 하나하나의 단면들이 온전한 '나' 인가? 라는 아주 단순 명료한 사실만이 가장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그 간격을 좁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은 저에게 있어서 온전한 '나'의 단면을 더 단단하고 반듯하게 만들어 주는 꽤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저의 모습에는 그런 과정이 가득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누군가가 보면 빛의 산란을 혹은 무더운 여름의 일렁임을 그저 한없이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곳에는 그리고 그런 시선에는 ‘스스로’를 조금은 더 ‘스스로답게’ 축척해 나가고 싶은 제가 담겨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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