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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고 싶은 것? 음, 그건 아마도 '공간 디자이너'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일종의 상담 비슷한 것을 받았습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분명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였습니다.
그저 이것저것 대화를 하면서 뭐가 되고 싶은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나름의 복잡한 커리큘럼을 통해서 제가 되고 싶은 그 '무엇' 에 대해 천천히 찾아나갔습니다. 그 장소가 이태원의 한적한 카페, 안도 (ANDO) 였던으로 기억이 날 정도로 꽤 확실한 상담이었습니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찾아낸 저의 그 무엇은 바로 '공간 디자이너' 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직업 혹은 업종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다시 생각을 해보니 나쁘지 않은 직업인 것도 같습니다.
'공간 디자이너' 라는 직업이 가지는 역할은 크게 뭐가 없기는 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구성을 하면 좋을지 저에게 물어보면 저는 그걸 확실하게 알아보는 것, 그게 끝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정말로 되었다고 가정을 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의뢰를 한 사람과 적어도 2시간 이상의 대화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야, 그 공간이 가지는 의미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런 의미가 있는 직업으로써 저는 '공간 디자이너' 를 선택했던 것 입니다.
만약에 그런 직업을 제가 정말로 가지고 있다고 상상을 했을 때 공간의 색감, 색채, 조명, 가구 등 모든 것을 챙겨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상상을 해봐도 너무나 재미있는 직업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름의 고민을 담아서 만든 공간이 의뢰인이 의도한 그 '무언가' 에 적절하게 와 닿는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직업적인 소명의식을 뛰어넘어 하나의 확실한 실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꽤 기분이 좋기도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요.)
친구와의 상담에서 시작한 상상의 직업 '공간 디자이너' 이지만 분명 그 안에는 제가 공간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얼마나 기분 좋게 생각하는지 담겨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리 잡은 마음이 지금에도 항상 함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윽고, 공간은 늘 정겹게 흐른다. 때로는 확실히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을 꽤나 좋아합니다. 지원이와의 데이트를 할 때에도 새로운 곳에 가기를 참 좋아합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곧 돌아오는 토요일에 가야 할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저만 좋아하면 고통이겠지만 다행히 지원이도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점은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찾아낸 공간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느냐? 그것은 또 아닙니다. 때로는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하고 그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사진을 몇 장 남기고 돌아오는 것이 다입니다. 가끔, 아빠나 엄마에게 말을 해주면, "참, 멀리도 찾아갔다." 라고 핀잔을 주시기도 하지만요.
핸드폰 속에 남겨진 사진 몇 장 그리고 짧게 남을 기억이 전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공간을 계속해서 찾아다니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새로움' 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어로써 뜻 그대로 ‘Something New’ 를 의미하기보다는 음, 뭐랄까요... 아마도 이건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올라가서 처음으로 문을 열였을 때, 빳빳하게 펼쳐져있는 침대의 새하얀 이불을 보는 그런 느낌으로써 새로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뭔가, 그런 빳빳하고 새하얀 이불에는 아무런 '흔적' 이 없을 테니까요. 저와 연관된 그런 흔적이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공간이 주는 어색한 느낌 그리고 냄새.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아무래도 '낯설음' 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 등 오감을 이용해서 공간을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킁킁거리면서 돌아다니지는 않습니다. 절대.)
새롭게 들어오는 감각의 정보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이 공간에 대한 낯설음은 점차 점차 작아지고 어느덧 호기심이 가득하게 생겨납니다. "어떤 공간일까? 왜 저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 뭐지?" 이런 정도의 호기심입니다. 그리고는 나름의 적응이 완료되면 슬슬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담습니다.
“주체로서의 나의 감각은 다 충족이 되었으니 오늘을 잊지 않도록 이제 기억을 좀 저장해볼까?” 하는 아주 간사한 전략이죠. 물론 저에게는 꽤 유용하지만요. 그래서 이렇게 이 글 속에 사진도 남길 수 있고 아무튼 저에게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 속에는 이전의 저와 연관된 그런 흔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울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매 순간순간을 호기심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아주 즐거웠던, 때로는 아주 슬펐던, 때로는 아주 아팠던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그저 호텔의 이불과 같은 새하얀 빳빳함만이 그곳에 무심코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이 늘 정겨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요.
물론, 그 정겨움 또한 수많은 인파와 주문을 하려고 카드를 꺼내는 순간과 겹쳐지면서 금방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짧은 정겨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또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늘 정겹게 흐르고 있으니까요.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새하얀 이불의 빳빳함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