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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Jan 14. 2020

냉장고의 크기가 가져온 변화

작은 냉장고는 주부를 부지런하게 만든다

요즘은 이틀에 한 번씩은 장을 본다. 냉장고 때문이다. 사택으로 이사 오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지어진지 수 십 년은 더 된 것 같은 낡은 외관도, 벽지가 군데군데 들떠있는 세면실도, 날벌레를 동반한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공기가 그대로 유입되는 현관문의 문틈도 아닌, 둘이 사용하기엔 너무 작아서 답답한 코딱지만 한 냉장고라고 가장 먼저 말하고 싶다.


물론 3개월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방근무를 명하면서 무상으로 사택까지 제공해준 회사 측의 배려는 고맙기는 하다만, 그래서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같은 기본적인 전자제품을 구비해준 것도 감사하기야 하다만, 문제는 그 모든 제품들이 전부 1인용 기준의 매우 작은 용량의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오래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사택의 냉장고. 냉동고의 비좁음은 말해 무엇하랴.


본사가 있는 오사카 교외 도시에 자리 잡은 우리의 신혼집에서 당연하듯 써왔던 4인 가족용의 412 리터짜리 큼지막한 냉장고와 10 kg 짜리 세탁기에 익숙했던 생활은 2-3일은커녕 1-2일 치 식량만으로도 꽉 차는 미니 냉장고와 이불빨래는커녕 수건이 10장만 넘어가도 담기 버거워하는 5 kg 짜리 용량의 통돌이 세탁기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솔직히 말해서 세탁기는 세탁을 자주 하면 되고, 이불 빨래는 코인 세탁소를 이용하면 어찌어찌 사용할 순 있다. 문제는 냉장고다. 원래 집에서는 김치는 물론 쌀도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었는데 사택의 미니 냉장고는 쌀은커녕 시판용 김치통 1개를 넣을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정도로 작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저절로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요즘 이틀에 한 번 내지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장을 보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택에서 걸어서 12분 거리 안에 슈퍼가 2군데나 있다는 점이다. 



한 군데는 가격은 좀 더 비싸지만 식재료의 경우 낱개 판매도 가능해서 원하는 만큼만 딱 살 수 있다. 게다가 카드 결제도 된다. 반면에 다른 한 군데는 식재료 별로 낱개 판매가 안 되는 것이 꽤 많고, 결제도 오로지 현금밖에 안 된다. 대신 다른 슈퍼보다 개당 가격은 좀 더 저렴하다. 


냉장고 크기가 크다면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렴하지만 대용량 위주로 판매하는 슈퍼에 가서 장을 볼 거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의 냉장고 사정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 비싸더라도 낱개로만 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생기곤 한다. 


혼수를 장만할 때 친정엄마는 내게 냉장고는 무조건 큰 것을 사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 사시면서도 400 리터가 넘는 양문형 냉장고를 쓰는 친정엄마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수십 년간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온 친정엄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냉장고의 크기와 주부의 행복은 비례한다는 것을. 



애초에 신혼집에서 쓰고 있던 가전들을 사택에 다 가지고 왔으면 이런 불편도 겪지 않았을 거다. 실제로 남편의 단기 지방근무가 확정되고 나서 지금 살고 있는 신혼집을 빼고 아예 이사를 오려고도 했었다.


그도 그럴게 단기 근무기간(3개월) 동안 집을 비울 텐데, 짐을 빼지 않으면 사람도 없는 집에 아까운 월세 3개월 치만 고스란히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럴 바에야 아예 방을 빼버리고 이사를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었지만 1회에 200만 원을 넘는 일본 이삿짐센터의 포장이사비용 견적을 듣고 이사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차라리 3개월 치 월세를 내는 게 더 경제적이었다.


1인용 가전을 둘이서 쓴다는 게 불편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적응하다 보면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 수 있다. 실제로 작은 냉장고 덕분에 한 가지 좋은 습관도 들이게 됐다. 쓸데없는 식재료 낭비를 안 하게 됐다는 점이다. 



필요한 것만 그때그때 사니까 양파 하나, 감자 한 톨도 버리지 않고 다 쓰게 됐다. 한 번 장 보러 가면 며칠 치 장을 한꺼번에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담아 와서 결국 유통기한이 지나 못 쓰고 버리는 식재료가 생기기도 했던 예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물론 아직은 한꺼번에 몰아서 장 보던 시절의 편안함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냉장고에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쌓아두는 대신, 최소한의 먹을 것만 사고 그때그때 먹고 싶은 요리를 해 먹는 삶에도 나름의 이점은 있다. 나는 이 새로운 생활에 좀 더 정을 붙여보려고 한다.


오늘도 꽉 차 있는 자그마한 냉장고를 열고, 하나라도 더 비집고 넣을만한 공간이 없는지 요리조리 살펴본다. 그렇게 발견한 작은 공간에 오늘 먹고 남은 찬거리와 내일의 찬거리용 식재료를 넣을 수 있게 될 때 느끼는 희열을 위안 삼아 나는 조금씩 이 작은 녀석에게 마음을 연다. 그나마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앞으로 남은 2개월 하고도 몇 주간 잘 지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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