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이 서지 않은 에세이스트의 한탄
며칠 째 글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우고 있다. 뭔가 쓰긴 하는데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고, 이거까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썼던 글을 삭제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겼다 없어지는 한글파일이 노트북의 바탕화면을 지저분하게 채웠을 때쯤 반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도 몇 번이나 문장을 썼다 지우고 있는데 그러다 하나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 이유는 무엇을 쓰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 정리가 먼저 끝나지 않아서인 건 아닐까 하는.
강원국 작가도 말하지 않았던가. 글 이전에 생각이 있다고. 내 생각이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글이 잘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생각 정리가 잘 되지 않았을까. 이것에 대해선 비교적 쉽게 답이 나왔다. 생각이야 늘 하지만 이 생각들을 글로 써서 세상에 공개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고, 글도 써지지 않은 것이다.
첫 책을 내고 달라진 점 중 하나는 내 글을 읽는 독자의 범위가 확장됐다는 점이다. 더 이상 온라인상의 ‘코붱’이 아닌 나의 친인척은 물론 그 친인척의 친구의 친구까지도 내가 어떤 글을 썼고, 어떤 책을 냈는지 알게 되는 상황이 됐다.
그렇다 보니 내가 이런 얘길 써도 되는지에 대해서 자꾸만 고민이 됐다. 가뜩이나 나는 글을 쓸 때 스스로 자기 검열을 꽤 하는 편인데 (그래서 내 선에서 거른 글들이 참 많은데) 또 하나의 거대하고도 촘촘한 거름망이 생긴 기분이랄까.
이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고, 저건 그분이 기분 나빠할 수 있고, 그건 너무 설익은 생각이고, 이것까지 쓰기엔 내 생활이 너무 드러나는 것 같고... 그렇게 수없이 걸러지는 이야기와 생각들 중 끝내 살아남아 글로 써진 것들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와 인물들로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소설가와 달리 에세이스트가 쓰는 글의 세계는 에세이스트 본인의 삶으로 한정된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까지 감출 것인지는 오직 작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다 보니 나처럼 자기 검열을 심하게 하는 에세이스트는 글이 멈추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글은 생각보다 술술 써지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어디까지 내 삶을 써도 될지 모르겠다. 글을 쓰지 않는다 하여 인생이 멈추는 것은 아니기에 살면서 자꾸만 쓸거리가 생겨나는데도 좀처럼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에세이는 작가 스스로의 결심이 섰을 때 써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 이전에 생각이 있지만 생각 이전에 ‘결심’이 있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이고 나서의 상황을 감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결심이 섰을 때, 내 글은 써질 것이고 나의 이 지독한 슬럼프도 끝이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