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선풍기를 정리했다. 핑계를 대자면 내가 사는 오사카는 지난달까지 낮에는 꽤 더웠다. 얼마나 더웠나 문득 궁금해져서 방금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오사카의 10월 평균 최고기온은 23.3도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의 9월 하순 날씨와 비슷하다고 하니 대충 어느 정도 더운지 감이 오려나?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디에선가 ‘그냥 핑계 아니냐’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맞다. 솔직히 핑계다. 하루 24시간 중 한낮에 한두 시간 더운 건 선풍기 없이도 잘만 살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 집은 10층 맨션에서도 7층이다. 창문만 열어도 바람이 꽤 잘 든다.
그래서 사실 조금 더 빨리 선풍기를 정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안 했다. ‘언젠가 해야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해야지가 아닌 ‘언젠가’ 해야지가 된 순간 선풍기 정리는 내 안에서 ‘언제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로 분류됐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 정리할 마음을 먹은 거다. 몸에 열이 많은 우리 남편은 비교적 최근까지 긴팔 맨투맨 티 하나에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 걸치고 출근을 했는데 오늘 아침엔 바람막이 안에 내피까지 껴입고 출근을 했다. 그걸 보니 더 이상 선풍기를 거실에 저렇게 방치해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이런 사소한 일이 새로운 행동의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한 달 여간 틀지도 않았는데도 먼지가 좀 쌓여있어서 물티슈로 꼼꼼히 먼지를 닦아내고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 버리는 용도로 산 45L짜리 불투명 비닐봉지를 위아래로 덧씌워 다다미방의 붙박이장 안에 넣었다. 그렇게 하기까지 한 15분 걸린 것 같다. 생각보다 금방 끝나서 놀랐다. 그리고 좀 허무했다. 이렇게 금방 할 것을 장장 한 달이나 미뤄두고 있었다니.
내가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시작하지 않은 것은 절대 내일 끝낼 수 없다.> 언제 봐도 뜨끔한 그 말이 오늘따라 유독 눈에 밟힌다.
겨우 선풍기 하나 정리했을 뿐인데도 괜히 뿌듯하다. 혹시 이렇게 미루고 안 해왔던 일이 또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사놓기만 하고 안 읽은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이것들을 하나씩 해치워봐야겠다.
나는 요즘 세 번째 책을 기획 중이다. 벌써 몇 번째 기획만 하고 있다. 그렇게 기획한 것도 한 5번은 엎어졌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느낌이 좋다. (이 말도 한 5번째 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몇 배에 달하는 책과 자료를 찾아봐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그럴싸한 기획안을 완성해도 막상 원고를 써보면 내용이 산으로 가거나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여서 애써 써둔 원고를 폐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번에도 또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라도 뭔가를 써야 한 권이라도 더 책을 쓸 수 있다.
누가 시킨 적도 없고 마감이 정해진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도 책을 기획하고 글을 쓰는 것. 그것만큼은 먼지 쌓인 선풍기를 한 달여간 방치하는 것처럼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작가라고 칭하는 사람이라면.
(2020.11.11. 0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