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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Apr 19. 2023

우리 동네 무인 점포

일본생활 기록부

지금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을 보러 집을 나섰다가 순간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우리 집은 큰 길가에서 좁은 골목을 몇 번 들어가야 나오는 주택가 단지에 있다. 그렇다 보니 처음 이 동네에 와서 장을 보러 갈 때마다 나는 구글맵에 의지해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나갔다. 문제는 내가 그리 길눈이 밝지 않다는 것이지만.


그날도 구글맵을 켜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를 찍어둔 뒤 천천히 걸어 나가던 참이었다. 처음엔 화면에 나온 경로대로 순조롭게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화살표가 가리킨 길이 아닌 다른 곳에 들어서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길은 바로 눈앞에서 뚝 끊겨있고 나는 어느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집 앞마당에까지 들어와 있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컹컹!”


설상가상 그 집 마당엔 내 몸의 절반 정도 될 것 같은 크기의 검은색 개가 있었다. 다행히 목줄이 채워져 있었지만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짖는 개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내가 다급히 그 집에서 뒤돌아 나오려던 순간, 내 시야에 미처 예상치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한 선반 가득 담겨 있는 감자와 당근, 양파와 배추에 이어 흰색과 빨간색의 작은 냉장고 2대까지. 마치 내가 원래 향하고 있던 마트의 진열대가 내 눈앞에 짠 나타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며칠 전 집으로 배달온 마을 잡지에서 읽은 기사 하나가 머릿속에 퐁 떠올랐다. 집 앞마당에서 무인 판매점을 운영한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거동이 불편한 인근 주민을 위해 약간의 야채와 계란처럼 간단한 것들을 집 앞마당에서 판매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여기가 바로 그 무인 판매점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골목은 좁은데 차량의 통행량이 많고 큰 길가로 이어지는 언덕의 경사가 생각보다 가팔라서 나 역시 장 보러 밖에 혼자 나갈 때마다 늘 긴장하며 걷곤 했다. 사지 멀쩡한 나조차 이럴진대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아마 장 보러 마트 한 번 나가는 것도 큰맘 먹고 가야 할 일이지 않을까.


며칠 전 내가 본 잡지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앞마당을 기꺼이 내어준 무인 판매점의 사장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그 기사를 읽었을 땐 취지는 좋지만 과연 장사가 될까 싶었는데 진열된 상품들의 상태를 봐서는 생각보다 야채의 상태도 좋고 가격도 마트와 비슷해서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반을 쭉 둘러보니 야채들이 담긴 상자들 옆에 초록색 양철 저금통과 계산기가 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본인이 살만큼 사면 각자 계산하여 알아서 금액을 저 저금통에 넣어달라는 뜻인 듯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여기서 그냥 사버릴까? 하는 생각에 줄곧 신경 쓰였던 냉장고들의 문을 하나씩 열어봤다. 선반의 오른쪽에 있던 흰색 냉장고에는 계란과 딸기가 몇 팩 들어있었고, 왼쪽에 있던 빨간색 냉장고엔 냉동식품과 멸치와 가다랑어 같은 건조식품들이 들어있었다.


그날 내가 마트에서 사고자 했던 건 감자와 양파, 계란 정도였다. 마음만 먹으면 그냥 거기서 다 사버리고 집으로 훌쩍 가면 됐지만 이 무인점포의 대상 고객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저것들을 산다면 거동이 불편하여 마트까지는 차마 갈 수 없는 누군가의 식탁이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집어 들었던 야채와 계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구글맵을 켰다. 나는 내 두 다리로 멀쩡히 걸을 수 있는 상태였다. 길눈이 어두워도 조금만 고생하면 마트 정도까지야 혼자서 어찌어찌 찾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도 이런 무인점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물론 우리 집 앞에 있는 것처럼 본인의 집 앞마당에서 별다른 잠금장치도 없이 선반 위에 야채들을 늘여놓고 판매하는 곳보다는 상가에 입주하여 제대로 된 냉장 시설을 갖추고 카드 결제까지 완벽히 되는 키오스크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 중인 곳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사는 동네는 일본에서도 도심지보다는 시골에 가까운 곳이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논밭이 펼쳐져 있고 높은 고층 빌딩보다 높아봐야 2-3층 정도 되는 단층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가끔은 이런 곳에 말 붙일 친구 하나 없이 오직 남편과 고양이 하나에만 의지하여 산다는 것이 외롭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누가 들어오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그 흔한 보안 카메라 하나 설치하지 않은 채(물론 개는 키우고 있지만) 그저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하나로 본인 집의 마당을 선뜻 내어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이 동네가 나는 점점 마음에 든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의 좋은 점을 살면서 조금씩 더 알아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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