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을 삭제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매일 수요일마다 연재해 오던 《엄마는 나도 처음이라서》라는 제목의 브런치북이다.
더 이상 쓸 소재가 없어서냐고? 아니다. 소재는 이미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쓸 시간이 없어서냐고?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제 갓 8개월을 넘긴 아기를 키우느라 글 쓸 시간이 부족하긴 하지만 1주일에 겨우 1개 올리는 건데, 그 정도 글 쓸 시간이야 내려고 하면 어떻게든 낼 수 있다.
더 이상 질질 끌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 같다. 이쯤에서 정답을 공개하겠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여태까지 잘 연재해 오던 브런치북을 삭제했다.
누군가는 에세이도 쓰고 소설도 같이 써도 되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둘 다 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된다. 나는 소설과 에세이를 동시에 쓸 능력도 시간도 없다.
그래서 원래 소설은 《엄마는 나도 처음이라서》 연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시도해 보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다 접고 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은 건 얼마 전 역서를 낸 나에게 남편이 한 말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했어. 축하해. 그런데 이제 완벽한 도피처가 또 하나 생겼네.”
“도피처라니?”
“소설을 안 써도 되는 이유. 에세이에 이어서 번역이라는 도피처가 또 하나 생긴 것 같아서.”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땐 무지하게 기분이 나빴다.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싸움을 거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간 이 남자와 살아오며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 사람은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라는,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지금껏 겪어온 내 남편은 ‘밸런스’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좋은 일이 생겼을 땐 기뻐는 하되 너무 들뜨지 않도록 마음을 진정시켰고, 너무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침울해할 땐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해 주고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곁에서 묵묵히 나를 응원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에세이스트이자 일한 번역가인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게 아닌, 소설이라는 새로운 일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빠르게 상승하던 혈압이 조금씩 정상범위로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그는 단지 내게 새로운 선택을 제안했을 뿐이다. 그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었다.
나는 도전을 택했다. 지난 4년간 잘(?) 닦아놓은 에세이스트로서의 길과 이제 막 첫발을 내밀고 있는 번역가로서의 길은 내가 ‘잘’하는 영역의 일일 것이다. 반면에 소설은 시작조차 두렵고 막막한, 내가 ‘못’하는 영역, 아니 나 같은 건 아예 할 깜냥도 안 된다고 느끼는 영역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 같은 건 절대 소설을 쓰지 못할 거라고 열심히 부정하고 있던 내 마음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소설을 쓸 능력이 안 되나?’
그런 생각으로 하루 이틀 고민만 하고 있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우연히 영상 하나를 봤다. 영상은 한 과학자가 벼룩을 상대로 하는 실험이었다. 벼룩은 원래 엄청난 도약 능력을 갖고 있는데 유리병 안에 갇힌 벼룩은 뚜껑에 몇 번 머리를 부딪힌 뒤로는 뚜껑을 치워도 유리병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는커녕, 뚜껑이 있던 자리까지만 뛰고는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본인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그동안 잘 만들어온 나만의 유리병이 너무 견고하고 안락해서 미처 밖으로 튀어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 있어봤자 산소 부족으로 결국 서서히 죽을 수밖에 없을 텐데.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표현하고 싶은 캐릭터도 있다. 그런데도 여태껏 소설을 못 쓴 건 나를 믿지 못해서였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더 철저히 준비해서 적당한 때가 되면 그때 소설을 쓸 거라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나에 대한 믿음도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져 갔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소설은 내게 어려운 존재고, 실제로 쓰다 보면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여러 번 엎어버리고 다시 쓰고 하겠지만 이번에야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써볼 것이다.
마침 밀리의 서재에서 매달 ‘밀리로드’라는 공모전을 진행 중인데 여기에 소설을 써서 참가하는 게 나의 첫 목표다. 브런치에는 밀리의 서재에 연재한 내용을 며칠 정도의 시차를 두고 공개해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쓸 건 아니고, 우선 내용 구상 좀 다시 제대로 하고….
이러다 또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며 결국 소설을 또 안 쓰게 될까 봐 이 글을 쓴다. 나는 이제 유리병 속 벼룩처럼 살고 싶진 않다. 내 능력에 한계를 짓는 짓은 이제 그만하련다. 소설, 그까짓 거 그냥 써보지 뭐! 이런 마음으로 일단 시작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