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붱 Dec 22. 2024

너의 처음을 응원해

30년 뒤의 너에게

안녕 S야?

2주 만에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구나.


2주 동안 한국에서 친할머니가 오셔서 우리 S랑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늘 붙어서 책도 읽어주시고 예뻐해 주시다가 이제는 다시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아졌는데 혹시 좀 쓸쓸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건 아니지?


오늘은 우리 딸이랑 할머니랑 같이 실외 놀이터에 처음 간 얘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해.


태어나서 지금까지 집 안에서 놀거나 실내 놀이터에서만 놀았던 너는 실외 놀이터에 간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단다. 집에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만져보고 뒤져보고 하던 네가 실외 놀이터에 발을 내딛던 순간 얼음처럼 딱! 굳어서 엄마 발을 붙잡고 울며 안아달라고 보챘지.


괜찮다고, 하나도 안 무섭다고 너를 달래보아도 너는 요지부동이었어. 엄마 눈에는 실내 놀이터에 있던 것들보다 더 낮고 단단해서 네가 타고 놀기 너무 좋아 보이는 유아용 미끄럼틀과 그네까지 설치되어 있는 그 실외 놀이터에서 네가 마음껏 뛰어놀기를 바랐지만 너는 전혀 놀 생각이 없었어. 그저 얼른 나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듯이 울며 보채기만 했지. 주변엔 너보다 더 작고 어려 보이는 아기들도 아무렇지 않게 뛰어놀고 있었는데 말이야.


순간 엄마는 덜컥 걱정이 됐어. 뭐지? 왜 우리 애는 안 뛰어노는 거지? 엄마도 할머니도 다 옆에 있는데. 이렇게 안전하고 재밌어 보이는 놀이기구가 많은데. 우리 애보다 더 작은 애들도 저렇게 활발히 뛰어노는데. 지금까지 내가 애를 너무 과보호로 키웠나? 좀 더 빨리 데려왔어야 하는 건가? 이대로 계속 무서워만 하고 다른 애들처럼 잘 뛰어놀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엄마는 깨달았단다. 아, 내가 또 조급해졌구나, 하고.


그동안은 그저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한 우리 딸이 갑자기 모자라고 느려 보이는 이유는 엄마 눈에 다른 아이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단다.


월령도 비슷해 보이는 저 아이는 벌써 저렇게 미끄럼틀을 타고 그네를 타는데. 흙바닥을 밟고 잔디밭을 뛰면서 여기저기 재밌게도 돌아다니는데. 우리 애는 왜 이렇게 느린 거지?라는 생각의 근원에는 '비교'가 자리 잡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엄마는 네가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신생아 시절에도 아기는 보통 뒤집기를 언제 하는 게 맞는지, 통잠은 언제부터 자야 하는 건지, 잡고 서는 건 언제부터 하고 걷는 건 언제부터 하고 말은 언제 트이는 게 일반적인지 같은 걸 찾아보면서 늘 불안해했단다.


어떤 애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통잠을 자기 시작하고 어떤 애는 100일 전후로 뒤집기를 시작하고 어떤 집 애는 돌이 되기 전에 엄마 아빠를 한다고 해서 우리 애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태어나고 1년 하고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엄마는 또 이렇게 혼자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마음 졸이고 있다니.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순간 엄마는 마음을 고쳐먹고 실외 놀이터에서 도통 놀 생각을 하지 않는 너를 그냥 번쩍 들어 안았단다. 그리고 놀이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같이 놀이기구도 만져보고 흙도 밟아보고 그랬지.


그러자 처음엔 그저 울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던 네가 엄마가 만지는 놀잇감을 같이 만져보기도 하고 엄마가 걸었던 흙바닥 위를 따라 걷기도 하고 무서워만 하던 미끄럼틀에 조심조심 올라가 쭈욱, 시원하게 내려와 보기도 하더라.


그렇게 10여분 정도 놀던 너는 다시 엄마 품에 안겨왔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첫날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오히려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지.


생각해 보면 우리 딸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서 처음 하는 것들, 처음 보는 것들에 대해 신기해하고 좋아하기보다 경계심을 먼저 갖고 조심스러워하는 편이거든. 근데 그걸 또 홀랑 까먹고 다른 애들이랑 비교하면서 우리 딸이 너무 느린 건 아닌가 하는 괜한 걱정을 했던 엄마의 행동을 엄마는 깊이 반성했단다.


그러고 보면 엄마라는 존재는 한 아이의 처음을 지켜보고 응원해 주는 존재이지 않나 싶어. 처음 목을 가눴을 때, 뒤집기를 했을 때, 어딘가를 붙잡고 겨우 섰을 때,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을 떼고 걷기 시작했을 때. 너는 모두 서툴렀고 어려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해내기 시작했거든.


네가 무언가를 처음 할 때 엄마로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너와 다른 아이를 비교하면서 왜 우리 애는 아직도 이런 걸 못할까, 조급해할게 아니라 우리 딸은 언젠가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너의 서툰 처음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너는 이제 실외 놀이터에 가면 아주 잘 뛰어놀아. 놀이기구는 아직 잘 못 타지만 놀이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풀도 만져보고 잔디도 밟아보고 꽃도 만져보고 낙엽도 밟아보는 그 순간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게 조금씩 눈에 보인단다.


S야. 혹시 지금 네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처음 해보는 일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면 네가 실외 놀이터에 처음 가고 조금씩 적응해 나갔던 이 순간의 기억을 한 번 떠올려주렴.


평소 조심성이 많은 너는 어떤 일을 처음 할 때 다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을지도 몰라.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그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샌가 너만의 방식으로 그 일을 다루게 되고 심지어는 즐길 수도 있게 될 거란다.


실외 놀이터에 처음 갔던 날, 얼음처럼 굳어있던 네가 이제는 놀이터에 발을 들이자마자 엄마 손을 놓고 후다닥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게 된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을 너무 주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가 안 해봐서 무섭고 두려워서라면 더더욱.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30년이 지난, 이 글을 읽고 있을 미래의 네가 겪게 될 그 모든 처음을 엄마는 진심을 다해 응원할게. 물론 엄마 역시 처음 하는 일들에 도전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면서 말이야.


내년의 우리 딸은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이 글을 읽고 있을 30년 뒤에는 또 얼마나 예쁘게 자라 있을까?


어쩌면 엄마도 태어나 처음 해보는 '엄마'라는 일이 그저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느리지만 확실히 자라나는 우리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인 것 같아.


내년에도 엄마랑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는 거 많이 하면서 신나게 놀자!


사랑해 우리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