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뒤의 너에게
안녕 S야?
어젯밤엔 네가 자다가 깨서 혼자 수면조끼를 벗고 뒹굴 거리고 있었어. 요즘 너는 원래 저녁 7시쯤에 자서 다음날 아침 7시쯤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쭉 잤거든.
이렇게 자다가 깨서 한동안 다시 잠에 못 드는 일은 너무 오랜만이라 엄마는 조금 걱정이 됐어. 혹시 또 어딘가 불편한 건가? 나은 줄 알았던 콧물감기가 재발한 건가? 아님 옷이 너무 두꺼워서 더웠던 걸까?
불안한 마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혼자 침대 안에 앉아서 놀고 있던 네가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었어. 소리도 없이 씩 지어지는 너의 미소에 엄마의 마음속에 피어난 불안과 걱정도 봄날에 눈 녹듯 조용히 사라졌단다.
수면조끼를 다시 제대로 입히고 네 몸을 들어 안아 엉덩이를 토닥여주니 너는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예고도 없이 엄마 뺨에 쪽! 뽀뽀를 해줬어.
엄마가 뽀뽀를 해달라고 조르고 졸라도 잘해주지 않는 우리 딸이 가끔 이렇게 먼저 뽀뽀를 해줄 때면 엄마는 온 하루의 피로가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단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말에 엄마는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또 들었어. 그땐 네가 아빠와 함께 놀며 꺄르륵거리고 있었지.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는데 지금의 이 풍경이 너무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
평소엔 잘 가지 못하는 여행지에 간다던지, SNS에서 유행하는 맛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는다던지 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데도 엄마는 요즘 참 행복하다고 느껴.
우리 딸과 엄마 아빠. 세 식구가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아서 그런 것 같아.
별거 없어 보이는 이 평범한 일상이 계속 유지된다는 건 사실 엄청난 행운과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거든.
네가 태어날 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
무통 주사를 맞지 않고 꼬박 13시간 30분의 진통을 겪은 뒤 태어난 너는 처음엔 잘 울지 않았어. 옆 분만실에서는 엄마가 있던 방까지 들릴만큼 쩌렁쩌렁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기를 낳는 게 처음인 엄마랑 아빠는 우습게도 이런 생각을 했단다. 아, 우리 아기는 순해서 잘 울지도 않는구나, 하고.
알고 보니 너는 태어날 때 숨을 잘 쉬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더라. 순해서 울지 않은 게 아니라 산도에 머리가 너무 오래 끼어있어서 기력이 다해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울지도 못하고 있던 거였대. 이런 걸 '신생아 가사(假死)' 상태라고 표현한다는 걸 엄마 아빠는 그때 처음 알았어.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심장박동, 호흡, 피부색, 근육의 힘, 신경 반사 등을 체크해서 1점부터 10점까지 점수를 매기는데 우리 딸은 태어나고 1분 뒤 쟀던 점수는 겨우 1점밖에 되지 않았지.
다행히 소아과 전문 의사 선생님의 빠른 처지로 5분 뒤 쟀던 점수에선 8점까지 점수가 오를 만큼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이렇게 신생아 가사 상태에 빠졌던 아기는 커서 뇌 쪽에 장애가 생기거나 여러 합병증이 발병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는 태어난 뒤에도 돌이 되기 전까지 1개월 간격, 3개월 간격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했단다.
병원에 가는 날이 될 때마다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너무나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는 요즘의 너를 보면 엄마는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던 불안을 조금씩 없앨 수 있었어.
이제는 조용한 게 뭐야, 쫑알쫑알 옹알이를 하면서 엄마한테 놀아달라고 보채는 너를 보면 태어났을 때 얌전하던 그 아이가 맞나 싶어.
친할머니가 선물한 펭귄 인형을 꼭 안아주기도 하고 고양이를 보며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소파 위에 혼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하며 노는 네가 엄마는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단다.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는 것 같은 하루하루 속에서도 너는 부지런히 크고 있었구나 싶어서 말이야.
S야, 만약 네가 요즘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네가 태어났던 순간의 일을 떠올려줬으면 좋겠어.
숨도 잘 못 쉴 정도로 기력이 다해 거의 죽음을 문 앞에 두었던 그 순간에도 너는 결국 눈을 뜨고 숨을 토하고 커다란 울음을 터트리는 힘을 가진 아기였다는 것을.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끝내는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과 힘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아기가 바로 너라는 것을.
그런데 아무리 해도 도저히 힘이 안 나고 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그땐 언제든 엄마에게 오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곁에만 있어도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집 안에서 엄마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잠도 푹 잘 수 있게 토닥토닥 엉덩이도 두들겨주고 우리 딸 손 꼭 잡고 어디든 같이 가줄게.
그런데 30년 뒤엔 우리 딸이 엄마랑 노는 것보다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하면 어쩌지? 순간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는 언제든 너와 놀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어. :)
어머, 벌써 아침 7시가 되었네! 네 방 CCTV를 보니 역시 너는 이미 잠에서 깨서 침대 안에서 혼자 놀고 있구나.
오늘도 너와 함께 하는 하루가 또 이렇게 시작되었어. 그럼 우리 딸 한번 꼭 안아보러 얼른 가볼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