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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Jul 27. 2020

토끼를 죽이지 않는 용기에 대하여

영화 <조조 래빗>을 보고

영화 <조조래빗>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 클럽’ 토론토 국제영화제편을 통해서였다. 히틀러가 상상의 친구인 한 아이의 이야기라니, 이 위험천만한 상상력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관객상 수상이라는 결과는 나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리고 그 가을부터 시작된 기다림은 지난 2월에서야 해소될 수 있었다. 서두에 먼저 밝히건대, 이 영화는 내가 뽑을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웃음과 감동, 교훈 모두를 훌륭하게 잡아낸 영화이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먼저 살펴보자. 이 영화는 주인공인 10살 소년 조조가 친구 요키와 함께 ‘최고의 주말’을 보내러 히틀러 유겐트 캠프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년들을 ‘진짜 남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그 캠프에서 조조는 첫날부터 군사 훈련을 받는다. 기대에 부풀어 캠프에 왔지만, 사실은 겁 많은 소년 조조는 모든 행동이 서툴기만 하고, 그는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의 눈에 띈다. 그리고 다음 날 훈련에서 그들은 진짜 남자라면 토끼의 목을 꺾어 죽이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조조에게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토끼를 쥐어 준다. 하지만 차마 토끼를 죽일 수 없었던 조조는 토끼를 풀어준다. 그로 인해 조조는 ‘조조 래빗’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부끄러움에 무리에서 뛰쳐나간 조조는 자신의 상상의 친구 히틀러에게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어다시 훈련장으로 달려가 사용법도 알지 못하는 수류탄을 들고 뛰어가는 무모한 행동을 한다. 그러다 얼굴과 다리에 크게 상처를 입은 조조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 집에서 영화 <조조 래빗>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전쟁 상황에서 남은 가족이라고는 엄마 로지뿐인 조조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처음에 조조는 엄마가 일을 하러 나간 집에서 홀로 상상의 친구 히틀러와 함께 나치즘을 고양시키기 위한 듯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평온한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이 평온은 자신의 죽은 누나인 잉거의 방 벽 속에서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하며 무너진다. 처음에 조조는 엘사를 귀신으로 착각하지만, 곧 그녀가 유대인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신고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힘차이로도 이길 수 없고, 조조의 엄마가 자신을 도운 것이라 말하는 엘사를 신고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그는 유겐트의 상징인 단검까지 뺏기고 만다. 그렇게 조조의 집은 조조에게 전쟁터가 된다. 혐오스러운 유대인이 함께 살고, 사랑했던 엄마는 그 더러운 유대인을 집에 들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신의 편은 히틀러뿐이다.


그러나 외로운 조조는 엘사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도 그녀에게로 자꾸 발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배운대로라면 머리에 뿔이 달려있어야 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야만 맞는데, 그저 평범한 소녀에 불과한 엘사가 궁금해진 것이다. 그는 유대인에 대해 조사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엘사를 자꾸 찾아가면서, 어느새 두 사람은 마음을 열고 실제의 친구가 되어간다. 조조가 작은 상처 때문에 괴물이라 놀림을 받던 시간들은,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괴물로 불리며 귀신처럼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 엘사를 이해하게 만든다. 게다가 유대인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지면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게슈타포가 엘사를 자신의 누나인 잉거로 오인하면서 유대인과 자신이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조조의 편견은 완전히 깨진다. 게슈타포마저 속일 수 있는데, 유대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조는 엘사와의 삶을 통해 ‘더러운 유대인’은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조조는 사실 집안을 전쟁터로 인식하고 만든 것은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짜 친구인 엘사를 지키기 위해 상상의 친구인 히틀러를 내쫓는다. 그러나 세상은 아이의 마음과는 달리 가혹하여 유대인을 돕고, 반전운동을 펼쳤다는 이유로 로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히틀러 시대에 자유를 바란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집 안의 전쟁은 끝난 대신, 외부의 전쟁이 거세질 무렵에도 조조와 엘사는 어쨌든 살아간다. 그리고 전쟁은 끝을 맺고, 영화도 끝을 맺는다.


지금까지 줄거리를 설명했다면, 이제 이 영화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특이하고 특별하지만, 특히 전쟁 속에 놓인 아이인 조조를 묘사하는 방식이 탁월하다. 흔히들 전쟁 영화 속에 아이가 등장하면, 그는 순수한 피해자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그저 너무나 끔찍한 전쟁 속에, 너무나 순수한 얼굴로 죽어가며 전쟁의 참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그러나 <조조 래빗> 속 조조가 그려지는 방식은 다르다. 물론 여느 영화처럼 아이는 구조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이 영화 속에는 히틀러를 조조의 상상의 친구로 코믹하게 그려내지만, 이는 아이들의 뼛속까지 깊이 주입된 나치즘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히틀러 유겐트 캠프만 해도 그렇다. 반나치 성향의 로지가 그 캠프에 조조를 보냈겠는가? 그렇지 않다. 독일의 청소년이라면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는 것은 의무였기에 그곳에 가는 것은 로지의 선택도 조조의 선택도 아니었다. 신발끈도 잘 묶지 못하는 10살짜리 아이가 히틀러에 열광하다 못해, 히틀러를 상상의 친구로 두고 있는 것은 아이를 세뇌한 것이 유대인이 아니라, 히틀러와 국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동시에 조조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처음 엘사를 만났을 때, 그리고 유대인의 삶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엘사에게 질문들을 던질 때, 조조는 엘사에게 끊임없이 모욕적인 말을 한다. 그가 엘사에게 건네는 말은 이는 인격 모독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언사들이다. 영화 중반까지 그는 여느 독일인들처럼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이 학습된 행위들이라고 해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또한 전쟁이 끝났을 때마저 엘사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벽 속에 가둬두고 살아가려는 시도도 한다.


이렇게 조조는 이전의 전쟁 영화 속 아이들이 그려지는 문법과는 달리, 피가〮해 관계 속에서 복잡한 행위들을 펼쳐나간다. 그는 이 영화에서 온전한 피해자도, 온전한 가해자도 되지 못한다. 물론 이 모든 행위가 히틀러 시대의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은 엘사가 조조에게 마음을 연 뒤 하는 말에 응축되어 드러난다. “너는 나치가 아냐. 그저 나치의 상징에 사로잡히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10살짜리 꼬마일 뿐이지.” 그녀의 말은 영화의 시작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영화의 시작에 히틀러 유겐트 캠프로 춤을 추며 향하는 조조의 모습은 온갖 히틀러 시대의 상징들을 담은 뉴스릴과 뒤섞이고, 배경음악으로는 비틀즈의 ‘I want to hold your hands’가 깔린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조조의 행동이 나치를 정말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나치즘에 동조함으로써 타인들과 함께하고 싶어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히틀러를 자신의 친구로 만들만큼 소속감에 집착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충분히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사훈련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토끼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아이인 조조가 남성성을 추앙하는 그 시대의 또래 남성 집단에서 잘 어울릴 수 있었을리 없다. 그는 아직도 요키처럼 엄마의 포옹을 바라는 아이일 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주요 인물 중에 ‘진짜 남자’는 없다. 일단 가족 내에 아빠가 없고, 군인인 캡틴K와 핀켈은 전쟁 중에 배제 당하여 사무실에 남은 자들로 두 사람만의 묘한 기류를 흘리며, 심지어는 조조의 상상 속에서는 히틀러마저도 ‘진짜 남자’와는 거리가 멀다. 패션에 과한 신경을 쓰고, 유니콘 고기를 먹는 모습은 심지어 퀴어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퀴어함은 감독이 창조한 순수한 아이가 상상하는 디테일일 것이다. 즉, 큰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조조에게 상상의 친구인 히틀러의 존재란 조조가 추구하는 남성의 이상향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남성이 되지 못하는 배제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짜 남자’ 같아 보이는 군인들도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독일군이 우세하던 시기 수류탄으로 인한 부상으로 아마도 이후에도 전쟁에 참가할 수 없을 조조를 놀리며 전장에 향하던 남성들은 이제 없다. 게다가 전쟁이 열세에 놓이자,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는 ‘진짜 남자’ 행세를 하던 히틀러마저 자살을 택한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히틀러만이 아니라, ‘진짜 남자’되기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남성 되기의 필수요소인 폭력은 정복욕으로 이어지고, 그 정복욕은 사실은 죽음 이상의 것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반전 영화의 뻔한 메시지이기는 하나, 사랑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음을 말한다. 세 사람이 그 집에 함께 살 무렵, 로지는 조조를 지키기 위해 아들의 나치 행위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길을 가다 마주한 반나치 행위로 죽은 이들을 역겹다며 외면하는 조조의 고개를 바로잡으며 그들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고 말했다. “이들은 해야할 일을 해서 죽은거야”. 그리고 조조에게 로지는 자유와 사랑을 항상 말했다. 또한 고작 얼마 간을 얼굴에 난 상처로 인해 집에 머물게 된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억압된 삶을 사는 엘사와 함께 하면서 사랑을 알게 됐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 조조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사랑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이 소속되기를 열망하던 집단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알게 된다. 진짜 친구가 생긴 그에게 상상의 친구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진다.

 

결국 처음부터 토끼를 죽이지 못한 조조는 엘사를 사랑하여 그녀를 가두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고, 서툴게나마 그녀의 신발끈을 묶어주고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는 토끼를 풀어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춤을 춘다. 자유롭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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