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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Jul 27. 2020

선동과 날조로 얼룩진 인종 재현의 문제

영화〈국가의 탄생〉을 보고

국가의 탄생은 영화의 기술적인 발전을 선도했다는 데에서 극찬을 받는다. 이전의 영화가 주로 짧은 시간동안 연극처럼 단상 위에서 소품과 인물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단순히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에 그쳤다면, 이 영화는 한 씬에서도 다양한 샷 사이즈를 이용하고 배우의 얼굴만을 잡아서 보여주는 클로즈업도 서슴치 않으며, 남북 전쟁이 이루어지는 갈등의 현장을 교차 편집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더욱 긴장감 있게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며 세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을 채워나간다. 이런 선도적인 연출들로 인해 그리피스는 현대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내용은 어떠한가?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는 극찬을 받지만, 내용적으로는 혹평을 받는 영화이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목적이 KKK단의 탄생을 미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크게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남북전쟁의 발발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고, 2부는 남북전쟁이 끝을 맺는 과정과 남북의 재통합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이 영화는 먼저 남북전쟁이라는 불행의 시작이 미국으로 이주한 ‘아프리카인’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아메리카에 오지 않았다면 남북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많은 흑인을 미국으로 데려온(사온) 것은 미국인이 아니었는가. 그렇게 흑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이어간다.


2부는 조금 더 악질적이다. 2부는 ‘이것은 남북전쟁과 재통합 시기를 그린 역사극으로 현재의 그 어떤 인종에 영향을 주려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글귀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 어떤 인종, 즉 흑인만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북부의 백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흑인을 이용하려 한 것이 사실이나, 린치라는 '혼혈인'을 악인으로 등장시키면서 그가 득세함으로써 백인들은 어느새 피해자로 묘사된다. 감독은 이런 묘사로도 모자라 “린치는 자신만의 힘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후원자와 '동족'을 배신한다.”라는 서술까지 덧붙인다.


이게 끝이 아니다. 흑인들은 의회에서 양말을 벗는다든지, 술을 먹는다든지 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열등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노예제가 폐지된 사회에서 '열등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은 합법화된다. 그러자 흑인들은 백인 여성들을 강간하러 다니고, 남부 가정의 대표로 등장하는 카메론 집안의 막내딸은 산책을 나갔다가 흑인 남성의 강간 위기에 놓이고 그를 피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백인 남성들이 흑인 노예 여성들을 강간해온 역사는 이 영화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장남인 벤 카메론은 이에 분노하여 KKK단을 조직하고, 이것은 미국의 질서를 더럽히는 흑인들에 대한 ‘자기방어’로 규정된다. 물론 이것은 사적 복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정의감에 불타서 남부 미국을 절망감에 빠뜨린 북부 미국까지 구제하기 위해 나선다. 게다가 북부 가문의 딸이자 린치에게 원치 않는 구애를 받던 엘시를 구제하며 두 집안이 합일된다. 이렇게 완벽하게 흑인을 배제한 백인들만의 국가가 새로이 탄생하는 것이다.

의회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흑인과 '영웅적인' KKK단의 모습의 대조

이 영화는 이런 식으로 역사를 날조한다. 이 영화에 노예제라는 끔찍한 제도에 대한 이야기는 과소재현되며, 백인들이 전쟁을 통해 겪은 고통은 과대재현된다. 이렇게 새로 쓰인 역사는 그 시대에 프로파간다로서 완벽하게 기능했다. 이 영화로 인해 힘을 잃어가던 KKK단이 다시 힘을 얻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여전히 기술적인 선도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영화사의 초장에 등장하고 있다

나 또한 이 길고 끔찍한 영화를 참고 본 이유는 영화사 수업의 과제로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사 수업을 들으며 서사라기보다는 세상을 기록할 수 있는 영상이라는 매체가 등장했다는 것에 집중하여 만들어진 단편 영화를 주로 보다가, 이 영화를 과제로 받았을 때 놀라웠던 것은 사실이다. 10분에서 3시간으로 늘어났다는 것 자체가 사실 놀라웠다. 일단 그것을 감당할 구조를 갖췄다는 것 아닌가. 물론 현대 영화의 문법에 익숙해진 나에게 영화 자체의 새로울 것이라곤 없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놀라운 점이었다. 약 10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의 문법이 익숙하다는 것은 그리피스가 현대 영화의 문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 '국가의 탄생'은 불편한 혁신으로 느껴졌다.


혹자는 단순히 기술은 뛰어나나 재현에서는 문제적인 영화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영화가 거짓으로 가득한 재현마저 설득할 수 있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둘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예를 들어 흑인, 또는 혼혈 남성의 성적인 위협들과 영웅적인 백인 남성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교차편집은 흑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키우는 데 아주 효과적인 기술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든 것과 유사한 흑인집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 것은 최근 조지 플루이드 씨의 사망 사건으로 인한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 의식과, 그와 함께 등장한 다큐멘터리 '수정헌법 13조'였다. 이 다큐멘터리에 간간히 등장하는 '국가의 탄생' 클립과 현재까지 이야기되는 흑인에 대한 편견, 그리고 그 편견이 만들어낸 죽음들은 여전히 이 영화가 사장될 수만은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편견은 모양만 조금 달라졌을 뿐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다른 권리도 아닌 생명권이 2020년에 요구해야하는 사항이라는 점이 너무나 아픈 현실이다. 이제는 잘못된 재현도, 잘못된 현실도 없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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