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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Jun 01. 2021

‘좋은’ 여성 캐릭터를 넘어서

<아워 바디>의 자영을 중심으로

2019년 2학기의 과제글을 옮긴 것입니다.


1. 들어가며

    바야흐로 여성영화의 해이다. 최근 상업의 <82년생 김지영>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독립 영화계에서도 이미 첫 장편으로 호평을 얻은 윤가은의 <우리집>을 시작으로 <벌새>, <아워 바디>까지 이어진 재능 있는 여성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영화의 공급만이 아니다. 일부 관객들은 ‘여성서사 밀어주기’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보지 못할 때에도 표를 구매하는 ‘영혼 관람’까지 자청하며(김수정 2019) N차 관람을 하기도 하며, 실제로 한 영화가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조성준 2018).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서사에 대한 갈망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운동과 맞물린 ‘여성서사 밀어주기’ 운동은 굉장히 까다로운 기준으로 여성서사를 정의한다. 이들은 여성영화가 페미니즘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기를 요구하며 ‘여성서사’를 검열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여성서사는 어떠한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실 앞서 여성영화로 호명한 여성영화 중 <아워바디>는 이러한 자격론적 측면에서 탈락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인 올바름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뿐만 아니라, 다른 요건 또한 갖추지 못했다. 농담처럼 출처를 알 수 없이 떠돌던 여성서사표에서 <아워바디>는 알탕과 준여성서사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영화는 다른 세 영화가 수많은 호평을 받은 것과는 달리 논쟁적인 작품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대해 호평을, 누군가는 이 영화에 대한 혹평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워 바디>는 8년차 실패를 거듭하여 행정고시를 준비한 30대 초반의 여성 자영이 달리기로 건강한 몸을 다져온 다른 여성 현주를 만나 함께 달리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여기까지가 매체와 예고편에서 읽을 수 있는 <아워바디>의 내용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여성서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과정에서 여성서사가 가져야할 수많은 규범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뒤 분노가 극에 달한 듯한 한 관객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몸이 탄탄해지니까 나이 든 남자와 자고 싶어요’라고 포스터에 쓰지 그랬어요… 달리기 이야긴 줄 알았어요. 중딩까지 콘돔 슬쩍하고, 티슈 뽑듯 섹스하고 술먹고 자살하는 얘긴 줄 몰랐어요. 진짜 중년 남자가 만든 영환 줄 알았어요.” 이 글이 보이는 스탠스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에 틀린 말은 없다. 이 영화에서 자영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섹스를 여러 번 하고 그 중 한 번의 섹스는 나이 든 남자와 이루어진다. 자살과 콘돔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이며, 이 영화 속 많은 이미지는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남성적 시선’으로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하는 것들이다. 중년 남자가 만든 줄 알았다는 말은 분명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이해는 가는 바이다.


    그러나 나의 <아워 바디>에 대한 독해는 다르다. 이 분노한 관객이 간과하는 게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여성이고, 주인공은 여성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지금까지 남성적 시선으로 여겨져 오던 것들을 전유해 온 것이고, 그것은 굉장히 전복적인 일 아닌가? 개별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는 맞을지 몰라도, 앞선 평에는 이 영화의 중요한 맥락들이 빠져 있는 납작한 평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개인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자유이지만,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평가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잠재적 관객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나와 같이 <아워 바디>를 다른 맥락과 시선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아워 바디>는 적은 관객수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서는 나름 논쟁적인 작품이 되었다. 나는 <아워 바디>를 옹호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반대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논쟁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야 이 글에서는 <아워 바디>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른 독해를 해보기로 했다. 나는 <아워 바디>를 여성이 억눌린 욕망을 깨달으며 사회의 정상적 욕망과 경합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영화로 보았기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구성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사회가 구성하여 자영의 몸에 깊게 뿌리 박힌 욕망을 분석하려 한다. 다음으로는 현주를 만난 뒤 자영이 자신의 감춰진 욕망을 깨닫고 어떤 방식으로 자영이 주체성을 찾아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워 바디>가 오독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본 뒤, 새로운 독해를 해보려 한다. 이 독해에서 중심이 될 키워드는 욕망, 몸, 그리고 시선이 될 예정이다.



2. 조종당하고 욕망당하는 여성의 몸

    욕망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주로 그러한 욕망들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중 나이와 성별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영은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 욕구가 강렬하지는 않아 보이나, 그녀는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사회가 주입한 욕망을 수행한다. 그녀는 미래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여느 청년들처럼 고시를 준비하고,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남자친구와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점차 그녀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그녀가 지금까지 가져온 욕망들이 구성된 것임을 증명한다.


    먼저 30대, 즉 청년으로서의 욕망이다. 이 영화는 인터넷 강의 속 음성으로 시작된다.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자영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녀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벗어던진 안경과 열심히 공부한 흔적들이 그녀가 오랜 시간 공부를 했고, 그것에 이미 지쳤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녀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이후 자취방을 벗어나 본가에 갔을 때 엄마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5급은 붙으면 다 내려가는거지? 집부터 알아봐야겠다.” 이 대사가 필요 없는 짐을 빼라는 엄마의 말에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장들을 살펴본 뒤의 장면에서 나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엄마의 욕망에 따라 30년가량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자영은 엄마의 기대를 배반하고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엄마는 영화의 끝까지 공부한게 아깝지 않냐는 이유로 공무원 시험을 제안하며 자영의 욕망을 안정성을 이유로 포섭하려 든다.


    다음은 여성으로서의 욕망이다. 이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은 남성을 사랑할 것으로,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것으로 상정된다. 그리하여 자영도 남성과 섹스를 한다. 여기서 자영은 남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섹스가 강제적으로 자행되는 것도 아니다. 자영은 그저 관습적으로 남성과 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의 섹스는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까지 무미건조하게 연출된 영화 속 섹스는 처음 봤다. 자영은 그저 남자친구의 상대가 되어줄 뿐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도 없어 보인다.



3. 욕망하는 여성의 몸

    앞서 서술한 자영의 두 가지 욕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가져온 자영의 욕망은 사실상 엄마와 남성이 욕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의 욕망에 따른 자영의 삶은 마냥 권태로워 보이고, 결국 권태는 이별로 이어진다.


    먼저 맞이한 이별은 남성, 즉 남자친구와의 이별이다. 영화가 시작한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영은 이별을 당한다. 여느 영화가 그렇듯, 이별로 시작하는 영화의 주제는 새로운 인연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통속적으로 남성이 들어갈 자리에 여성을 기입한다. 이별 후 캔맥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영은 현주를 만난다. 두 사람은 이 장면에서 완전한 대비를 이룬다. 8년의 시험 준비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버거워진 자영은 계단 중간에 멈춰 캔맥주 하나를 꺼내 마시다가 다른 캔맥주를 떨어뜨린다. 반면 현주는 계단을 달려 올라가는 존재로 자영이 떨어뜨린 캔맥주를 주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건네 주고 제 갈 길을 간다. 사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자영의 일방적인 응시에 가깝다. 이 장면에서 현주의 모습은 전체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리부터 가슴 그리고 얼굴로 이어지는 자영의 시선을 통해 현주는 파편화된 몸에서 자영과는 다른 몸을 가진 여성이 된다. 이때의 시선은 전남자친구와의 섹스 장면보다 섹슈얼하다. 자영은 섹스를 할 때도 남자친구를 굳이 보려 하지 않았으나, 현주의 몸은 샅샅이 뜯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선은 자신에게 캔맥주를 건네주고 제 갈 길을 가는 현주를 다시금 쳐다봄으로써 완성된다.


    이런 다른 시선은 자영의 이성애자로서의 욕망이 사회로부터 구축된 것임을 드러낸다. 몸은 남성과의 섹스를 수행했지만, 몸을 경유한 욕망이 드러나는 시선은 다른 말을 한다. 현주에게 보내는 시선으로 속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서 자영은 여성의 몸만을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넘어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욕망을 실천한다.

    

    이때 두 번째 이별이 이루어진다. 새로운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 그녀는 이전의 일상을 빈틈없이 채웠던 공부를 놓는데, 이것은 엄마의 욕망과의 이별로 읽을 수 있다. 대신 자영은 그녀의 텅빈 눈을 빛나게 한 현주의 몸,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한 달리기를 한다. 그리고 다시 현주를 만나 그녀와 함께 러닝 모임에 참여하여 다른 몸을 만들어 가며 이전의 삶을 통해서는 느끼지 못했던 성취감을 느끼고 몸의 변화를 느낀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현주가 있다는 것이다. 자영은 첫 모임에 참여했을 때부터 현주만을 바라보고 뛰며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도 현주에게만 질문을 건넨다. 상대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은 자영만이 아니다. 현주 또한 자영에게 섹스 어필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주는 자신의 집으로 자영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의 섹스 판타지를 나눈다. 말로는 남자와 자고 싶다고 하지만, 현주는 자영의 앞에서 덥다며 옷을 벗고 장난을 친다. 이는 자영을 유혹하는 것으로 보이며, 두 사람은 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영은 현주와의 만남을 통해 이전에는 없던 생기를 찾는다.



4. 오독되는 <아워 바디>

    본격적으로 <아워 바디>가 논란이 되는 지점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영화의 초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자영의 반대급부와 같은 캐릭터로 등장한 현주의 자살은 영화의 서사가 변하는 변곡점이 된다.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현주의 궤적을 쫓는다. 가장 처음으로 하는 일은 어플에 남은 그녀의 달리기 코스를 쫓는 일로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자영은 현주와 함께 하던 러닝 모임의 멤버와 의미 없는 섹스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턴 지원을 넣은 회사에서 상사와 섹스를 한다. 남성과의 섹스에 대한 갈망, 그것도 나이 많은 남자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현주의 섹스 판타지였다. 현주는 자영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른 살 남자랑 자면 어떨 거 같아? 어린 애들은 맨날 자기 몸만 자랑하잖아. 여기저기 만져보라 그러고. 나만 억울하잖아. 나도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온건데.” 자영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술을 잘 마신다는 말에 술 마시려고 운동을 한다던 현주의 말을 그대로 반복할 뿐이다. 정부장의 욕망도 분명히 알 수 없다. 자영이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하자 어떤 남자 좋아하냐며 소개팅을 제안한 뒤 부장은 이런 말을 이어 간다. “자영씨는 말야, 건강해 보여서 좋아.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부럽다고.” 나에게 그의 욕망은 자영에 대한 성욕보다는 젊음과 젊음을 가진 몸에 대한 순수한 부러움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자영은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이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두 사람의 섹스씬으로 이어진다.


    앞서 소개한 <아워 바디>에 대한 “몸이 탄탄해지니까 나이 많은 남자랑 자고 싶어요.”라고 포스터에 쓰지 그랬냐는 혹평은 이 장면에서 유래된다. 서사를 따라가 봤을 때 이와 같은 욕망의 해석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현주를 통해 운동을 시작했고, 분명히 자영은 현주를 성적으로 욕망했던듯 하나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 욕망이 이룰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자영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영은 기존의 사회로부터 강요받은 욕망을 비워낸 그릇에 현주에 대한 욕망을 채웠던 듯하다. 그러나 현주마저 사라졌을 때, 자영은 그 자리에 현주의 욕망을 기입한다. 그리하여 남성과의 섹스를 다시금 이어가는 것이다. 사실 또래와의 섹스인 첫 번째 섹스는 평범하다. 그러나 현주의 말처럼 자영은 자신의 몸만을 과시하는 남성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운동을 통해 다져진 자신의 몸을 먼저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나이 많은 남성인 정부장과의 섹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이 부적절하게 읽히는 것은 현실 세계와 관련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으로 여겨지는 이 지점은 현실세계와 연결되어 해석된 듯하다. 직장 내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직장 상사와의 섹스는 부적절하게 읽히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영이 갓 인턴에 지원했다는 것은 두 사람의 권력관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에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영화 내부에서조차 주변인들은 자영이 인턴이 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생각하며 비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 전반의 시선 또한 문제적으로 여겨진다. 이 영화에는 파편화된 여성 신체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라 보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에서 자영은 현주와 동생인 화영을, 동생과 엄마는 달리기를 시작한 뒤 변화한 자영의 몸을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을 대상화하는 이미지들은 주로 남성적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성적 불평등의 세계에서 영화는 남성 관객의 욕망을 상정하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에로틱한 성적 대상으로 전락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Laura Mulvey 1975). 아마 관객들이 불편한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지점도 이런 시선과 맞닿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남성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과 주변 인물, 그리고 관객 대부분이 여성인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멀비의 논의는 적절치 않아 보이지만, 아직 작금의 ‘여성 영화’를 분석할 적절한 도구가 없는 상황이기에 <아워 바디>는 누군가에게는 혼란스럽고 불편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5. <아워 바디> 다시 읽기

    사실 <아워 바디>는 혼란스럽기에 불편하기에 다시 읽어야 하는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불편함 속에 전복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앞서 복잡하게 말했지만, 이 영화는 여러 남성과 이루어지는 헤테로 섹스, 그 중에서도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 간의 섹스 때문에 크게 비판받은 영화이다. 운동을 권장하는 영화인줄 알았더니 기껏 몸 만들어서 남성과 섹스를 해서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부분이 적지 않은 여성 관객들을 분노케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섹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이다. 사실 세 번의 섹스에 큰 의미는 없는 듯 하나, 굳이 의미를 부여해봐도 첫 번째는 이성애자 정상성을 보여주기 위한, 두 번째는 현주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세 번째는 자신의 몸에 대한 인정 또는 현주의 판타지를 체현해보기 위한 목적에서 자행되는 행위에 불과하다. 게다가 섹스씬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에서 남성의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로라 멀비의 논의에 기초해서 해석하더라도 여성이 성적 주체가 되고 남성이 성적 대상이 된 전복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자영과 남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가 되는 욕망은 자영을 비롯한 여성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학자 재키 스테이시는 남성 중심적인 이성애적 시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영화 속 여성인물들 간의 관계에 주목하며 욕망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분석하는데 그녀의 분석은 <아워 바디>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된다. 그녀는 ‘차이’로 인해 서로를 욕망하는 캐릭터들을 분석하며 새로운 내러티브의 분석 방식을 제시한다(김가희, 고부응 2009). 특히 「필사적으로 차이 추구하기」에서 다루어지는 <이브의 모든 것>은 <아워 바디>와 일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브의 모든 것>은 브로드웨이 스타 마고의 팬인 주인공 이브가 그녀를 선망하다 못해 그녀의 모든 것을 욕망하고 모방하다가 결국엔 그녀의 모든 계략을 파악한 다른 남성 가부장에게 처벌을 받게 되는 내용이다(Jackie Stacey 1987). <아워 바디>에서의 자영의 현주에 대한 욕망은 이브의 욕망이 수행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자영은 자신과 다른 현주의 몸을 선망하여 그녀가 가진 몸을 가능하게 한 달리기를 하고 그녀를 좇아 그녀가 속한 모임에 참여하며, 그녀가 죽은 뒤에는 그녀가 살아왔던 또는 살고 싶었던 궤적을 밟아 나간다.


    다른 점이라면 <아워 바디>에서 처벌을 받는 대상은 욕망의 주체가 아닌 객체인 현주라는 것이다. 현주의 죽음은 <이브의 모든 것>의 처벌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읽힌다. 이브는 욕망했기에 처벌받는 존재이지만, 현주는 욕망하지 않기에 처벌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주가 꿈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주는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작가에 대한 꿈은 번번히 좌절당하기 때문에 현주를 괴롭게 한다. 자영을 사로잡은 순간의 현주의 달리기에서 에너지가 느껴지지만, 현주의 속사정을 안 뒤 그녀의 달리기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몸부림마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영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이 대사를 다시 보자. “서른 살 남자랑 자면 어떨 거 같아? 어린 애들은 맨날 자기 몸만 자랑하잖아. 여기저기 만져보라 그러고. 나만 억울하잖아. 나도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온건데.” 현주의 억울함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 한 인간의 욕망에서 온전하게 자신으로 기인한 것과 타인에게서 온 것을 분리해낼 수는 없겠지만, 현주의 달리기와 몸에 대한 욕망은 타인의 인정, 그것도 남성의 인정을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브가 여성을 욕망하다가 가부장에게 처벌을 받는다면, 현주는 가부장에게 욕망을 바라다 스스로를 처벌한다. 당장 닿지 못할 작가라는 욕망과 타인이 줄 수밖에 없는 인정은 너무나도 위태롭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화에게 가장 건강해 보이던 현주는 결국 현실을 탈주한다.


    반면 자영은 보기보다 단단한 사람이다. 오랜 기간 타인의 욕망에 맞추어 살아왔지만, 8년을 준비한 시험을 포기한 뒤 자영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다. 현주를 욕망하여 현주의 삶을 끝까지 쫓아보는 것은 우리가 이 영화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영의 삶의 일면이다. 한 번 다른 선택을 한 자영은 엄마의 말도 친구의 말도 듣지 않으며 자신의 의사를 고집한다. 계속 떨어지는 시험을 포기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인턴에 지원도 해보려 하지 않는 자영에게 이들은 자영이 세상 물정 모르는 존재라 말한다. 그러나 자영은 현실에 대한 수긍이 빠를 뿐이다. 닿지 못할, 또는 어려운 꿈을 쫓지 않는 것이 나쁜가? 친구인 민지의 도움을 받아 얻은 일자리이기는 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영에게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요구하는 세상은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리하여 자영은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규정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한다. 특히 가장 문제적인 부장과의 섹스를 친구인 민지가 비난하자 자영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근데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해? 왜 내가 인턴 되려고 정부장이라고 잤다고 생각해?” 혹평을 던지는 관객들은 이 말을 곱씹어봐야 될 것이다. 자영이 정부장과 섹스를 함으로써 남성의 욕망에 포섭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영이 정부장의 젊은 여성의 몸에 대한 욕망을 이용하여 현주와 같이 자신이 잠시 가졌던 인정 욕구를 채운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변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지만, 자영은 그 시선들에 굴하지 않는다.


    동생인 화영과 자영의 관계도 흥미롭다. 영화 초반 자영은 화영의 몸에 시선을 보낸다. 치마가 너무 야하다며 화영을 바라보는 씬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영이 달리기를 하고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자영에게서 화영으로 향하던 시선은 화영에게서 자영으로 향한다. 가시적인 몸의 변화는 화영도 달리게 만든다. 시선의 역전이 드러나는 씬에 이제는 사라진 존재인 현주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 놓여 있는 것은 상징적이다.

    영화 내부에서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죽음이 동반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영이 홀로 서기 위해서 현주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주의 사라짐은 자영에게 현주를 욕망하거나 현주의 욕망을 재현하는데 그치는 삶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순간이었을테다. 또한 이것은 욕망의 객체로서만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그 삶은 언젠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영은 현주의 궤적을 쫓는 것을 끝낸 뒤, 결국 자신이 욕망하던 일을 행한다. 그것은 자신이 원했던 비싼 호텔방에서의 섹스이다. 이것은 자신과의 섹스로 그녀는 타인의 욕망 속에 살기를 거부하는 선언과 같은 일로 보인다. 이것은 이 영화의 끝이자, 자영의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6. 나가며

    여성에게 자신의 몸만큼 가까우면서도 먼 것이 있을까? 여성의 몸은 사회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 당하고, 재단당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타인의 시선과 공존하는 일은 숙명일지 모르나 그 시선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워 바디>는 그 노력을 가장 솔직히 풀어낸 결과물이다. 그리하야 자영은 분명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여성 캐릭터는 아니게 된다. 그녀는 마음껏 욕망하고 그 욕망을 실제로 수행해내기 때문이다. 솔직함은 나쁜 일인가? 여성의 욕망은 무결해야 하는가? 지금 여성 영화를 소비하는 주된 관객층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상업의 <82년생 김지영>과 독립의 <우리집>, 그리고 <벌새>의 주인공에게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욕망은 희미하다. 김지영과 하나, 그리고 은희에게 욕망의 주체보다 훨씬 더 크게 주어지는 정체성은 구조의 피해자이다. 피해자인 주인공에 대해 비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공통으로 경험하는 피해에 대해 깊이 다루는 작품은 중요하며, 세 작품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그저 나는 영화계의 문제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과연 여성 영화계에 피해자가 아닌 주인공이 설 자리가 있는가? 물론 피해자의 대척 지점에 여성 히어로가 간간히 등장하기는 한다. <걸캅스>가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겠는데, 이것이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여성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보다 대의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2008년에 장편 <미쓰 홍당무>로 데뷔한 이경미 감독의 작품들이 한국 사회에서 마니아층을 쌓고 있음에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2008년이야 그렇다 쳐도,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2016년의 <비밀은 없다>마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여자’로 여겨지는 이경미 월드의 여성 주인공들도 <아워 바디>의 자영도 아직 영화계에 두 발로 서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여성 주인공이 필요하다. 당장 극장가에 걸린 영화의 남성 중인공들만 봐도 문제점은 쉽게 자각될 것이다. 이들은 정의롭거나, 잔인하거나, 멍청하거나, 착하거나 그 전부이기도 하다. 여성에게도 그런 기회가 필요하다. 지금 여성 영화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캐릭터와 서사의 입체성이 아닐까? 여성도 욕망하고 실패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더욱 더 많이 보여져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워 바디>가 좋았던 것도 자영의 인간적인 욕망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자영이 ‘올바른’ 선택만 했다면 영화의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물론 올해는 행복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각종 기사들에 등장하는 여풍이 불고 있다는말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올해 유난히 여성 감독이나 여성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가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바람이라면 사회와 경합하며 새로움을 창출하는 여성 캐릭터를 표현하는 다양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더 나쁜 더 욕망하는 여성 캐릭터를 기다리고 있다. 나아가 여성 영화가 많아져서 남성 영화라는 없는 것처럼 여성 영화라는 이름조차 사라질 수 있는 사회를 기다려 본다.



참고문헌

김가희, 고부응, 「여성 관객은 무엇을 원하는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의 동일시 문제를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09.

김수정, 「영혼 관람 등 ‘여성서사 밀어주기’, 여성창작자들 생각은?」 노컷뉴스, 2019.07.10.

조성준, 「입소문의 힘! ‘미쓰백’ 손익분기점 넘어섰다」, 한국일보, 2018.11.03.

Jackie Stacey 「Desperately Seeking Difference」, Screen, Volume 28, Issue 1, 1 January 1987.

Laura Mulvey,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Screen, Volume 16, Issue 3, 1 October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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