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백>을 보고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조소로 그 시간들을 메우곤 한다.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회피하며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 행위는 잠시간은 유효할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조소는 절대로 고통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그저 고통을 외면할 수 있게 틈을 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다. 어느새 이는 내가 고통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고 말았기 때문이다.
<플리백>의 주인공은 그 지점에서 누가 이길 바 없는 인물이다. 강렬한 시리즈의 시작을 돌이켜보자.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 현관을 바라보던 주인공은 갑자기 카메라를 응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늦은 저녁 찾아올 누군가와 자신이 섹스를 할 것이라는 암시,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문을 열고 찾아온 남성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두 사람은 침대로 향한 뒤 섹스를 한다. 섹스를 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그녀의 말은 스포츠 중계에 가깝다. 그리고 다음 날 통속적인 작별의 순간에도 상대 대신 카메라를 응시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시즌 1은 줄곧 섹스 또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녀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섹스의 대상을 찾고, 섹스를 하면서도 공허해한다. '누군가가 내 몸을 원한다는 느낌'을 찾아 남성을 유혹하지만, 순간의 행위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그녀는 다시금 카메라를 향해 알 수 없는 농담들을 던지는 것이다. 시즌 1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지는 아마도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건이었던 친구 부의 자살 아닌 자살조차 자신이 그녀의 남자친구와 한 섹스 때문이었음은 그녀의 섹스 의존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시즌 2는 어떠한가. 371일 후, 그녀는 서사 축약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This is a love story."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버지의 결혼식 전 열린 가족 만찬 자리, 주인공은 어쩐지 조금은 달라 보인다. 카메라가 아니어도,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내뱉어 버리는 것이 주인공의 특징이었는데 그런 행동을 더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는 않는다. 이 러브 스토리는 만찬에 참여한 아버지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을 신부를 향한다. 아마도 시즌 1에서 그녀가 항상 잘못된 사람들만 골라 사랑에 빠진다는 말을 증명하듯, 사회도 신도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그녀는 시작한다. 여전히 어떤 관계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카메라를 응시하며 우리에게 말을 거는 주인공은 시즌 1보다도 더 부도덕하면서도 한없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 부도덕한 이야기의 전개는 최근 본 어떤 시리즈보다도 나를 치유해주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런 요약을 보고 나면 도대체 왜 이 시리즈를 좋아하고, 소개하고자 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크게 그 두 가지의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이 시리즈는 근래에 본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극들이 빠져있는 '섹스는 남성과 해도 진정한 관계는 여성들 사이에서 맺어진다는 공식'에 매몰되지 않은 작품이다. 근래의 적지 않은 여성 서사에서 나는 과거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 프레임을 깨고자 하는 시도로 여성에게 남성은 삶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결국 여성이 여성을 도와 살 수 있게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해왔다. 물론 그런 서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도 여성들이 큰 도움을 주었고, 나도 그런 여성이 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모두 그런지, 그렇다면 그런 서사만이 등장해야 하는지는 다시 논해봐야 할 이야기다. 왜냐하면 여성만이 사는 세상이 아닌,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여성에게 해를 끼치고 남성이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들은 여성을 주저앉게 만들기도 하지만, 살아갈 수 있게 돕기도 하며, 그것은 삶의 다이나믹을 만드는 입체성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그 모순들을 훌륭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카메라(또는 우리)를 보고 말을 한다고 좋게 이야기했지만, 친구였던 부가 죽은 뒤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정말로 없어서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하기도 하는 주인공이 그래도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관계는 극의 초반 주인공이 운영하는 카페를 살리고자 대출을 받으러 가서 만나는 남성 은행 매니저와의 관계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아주 끔찍하다. 주인공이 운영하는 기니피그 카페의 사업 계획서를 우습다는 듯 검토하는 매니저와 (아마도) 대출을 성사시키고자 섹스어필을 하려고 스웨터를 걷어올려 속옷 차림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안에 옷을 입은지 알았다고 우기다가 쫓겨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가끔은 잘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고, 주인공은 조용히 매일 울고 싶기만 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시즌 1의 마지막, 주인공은 자신이 자초한 고통과 타인이 밀어 넣은 고통 속에 갇혀 밤새 거리를 헤매다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인지한 뒤, 카페에 데려다 주고 그녀가 자신의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는 바람에 그녀가 도로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는 끔찍한 비밀을 듣게 된다. 사실상 시청자도 주인공에게 정을 주는 게 옳은지 고민하게 될 무렵, 남자는 그 자리를 그저 떠나버리는 대신 인간은 실수를 할 수 있다며 다시 대출 신청서를 들고 온다. 그것은 자신이 고백했듯 자신도 실수를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실수(?)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극이니까 과장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사실 그보다 더한 현실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자. 주인공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부가 자신에게 건넨 말을 되건넨다. “그게 사람들이 연필 뒤에 지우개를 단 이유겠죠.” 그가 그녀를 살게 하는 것이다. 더없이 멀어 보이는 타인의 친절이 누군가를 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그 존재가 이 은행 매니저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돕는 자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존재가 하나의 정해진 양태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서는 좋은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삶은 꼭 그려온 대로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게다가 과거에 성추행을 했던 남성이 그 죄를 뉘우친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는 순간은 끝도 없이 많지만, 굳이 콘텐츠에서까지 변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는 남성의 모습을 보고 싶진 않다. 나는 더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변하는 남성의 모습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플리백>은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도 그린다. 이 극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애증의 관계에 놓인 동생은 알콜 중독자 남편과 불행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자신과 이름이 같은 남성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아내가 될 자신의 대모(무려 이 역할은 올리비아 콜먼이 맡는다!)는 섹스 박람회를 열고, 여성 사업가 상을 수상한 여성은 자신이 여성으로 묶여서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욕을 먹기 싫어서 행사에 참여한다. 주인공의 삶이야 말할 것도 없는데, 그녀는 성적 매력을 이용하고, 오용하면서, 공허를 채우기 위해 섹스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너무나 섹스에 매몰되었다며 백래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남성과의 섹스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이렇게 섹스에 매몰된 이유, 남성들과 관계에서의 역동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동반한다. 또한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봐주는 신부와 사랑에 빠지면서 나누는 섹스는 그녀가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의 일환이 되며,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섹스는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을 지속적으로 무성적인 존재로 소비하고, 커리어적인 성취를 이루기만 강요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닐까. 일단 우리의 탄생을 떠올려봐라. 우리는 성애화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다음으로 이 작품에서 좋았던 점은 ‘제 4의 벽’의 이용 방식이었다. 촬영과 편집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인물들은 많아졌으나, ‘제 4의 벽’을 잘못 넘어섰을 때 픽션은 분명히 유치해지기 십상이다. 영화나 이런 시리즈물들이 아무리 종합예술이라 할지라도, 분명 이런 극들은 시각이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카메라를 보며 온갖 것을 설명하는 행위는 극을 유치해지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플리백>은 그렇지 않았다. 주인공은 상황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을 넘어 사카즘적인 말들을 뱉어냄으로써 상황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시각을 거친 세계는 유쾌하되 어둡다. 그리고 이 작품의 비슷한 류의 다른 작품과 차별적인 부분은 대화 상대 대신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을 간파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제 4의 벽'이 회수(?)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시즌 2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신부이다. 신부는 주인공에게 도대체 계속 어디를 다녀오느냐 묻는다. 특히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주인공과는 달리 바깥에 말을 걸지 못하는 신부의 모습은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취하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나타내준다.
성직자치고는 비관적인 자로 보이나, 세상을, 타인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신부에게 ‘제 4의 벽’을 넘어설 이유는 없다. 대신 세상을 사랑할 수 없어 계속 그 벽을 넘고 마는 주인공을 알아채준다. 이런 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순히 ‘hot’하다고 느끼던 신부가 자신을 알아차려줬을 때 그녀는 전에는 느끼지 못한 사랑을 느끼고, 신부가 마련한 고해성사의 자리에서 삶에서 느끼는 혼란들을 털어놓는다.
아침에 뭘 입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누가 매일 아침 그런 얘길 해주면 좋겠어요.
뭘 먹어야 할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해야 할지, 무엇에 화내야 할지,
무엇을 듣고, 어떤 밴드를 좋아하고 어떤 티켓을 사고,
어떤 농담은 되고 어떤 농담은 안 되는지,
뭘 믿어야 할지 누가 말해주면 좋겠어요.
누굴 투표하고, 누굴 사랑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요.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엉망진창으로 산 것 같거든요
자신 또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왔던 신부도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키스를 하고, 결국엔 신부 또한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섹스를 한다. 이때 주인공은 처음으로 스포츠 중계를 하듯 섹스 중에도 끊임없이 말하는 대신, 카메라를 치운다. 순간의 보여짐에 그치는 이 베드씬은 그 어떤 베드씬보다 섹시하다.
결말에 이르러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신부와의 사랑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상할 수 있었던 결말일테다. 서로는 서로를 놓아주지만, 우리의 섹스 중독자 주인공은 신부의 손을 놓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사랑해요. 육체적인 건 잠시 배제한 채 생각해보고 싶어요.” 남자친구를 잃고도 또 다른 섹스 상대를 찾아 헤매던 주인공이 육체적인 것을 배제하자는 말을 하다니, 장족의 발전 아니겠는가.
물론 감동도 잠시 주인공은 맨 처음에 대모의 작업실에서 훔친 이 작품의 중심 소품인 가슴 조형을 가방에서 꺼내든다. 그때 다시금 생각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것을 쥐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데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인사는 주인공의 현실의 관계에 이입하지 못한 채 살아오던 삶에 대한 작별인사이자, 각본가이자 제작자로서의 피비 윌러 브리지의 시청자에 대한 인사일테다. '제 4의 벽'을 넘나드는 작품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지만, 이 작품만큼 '제 4의 벽'을 멋진 방식으로 봉합하는 작품은 이전에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아주 이상하지만, 나에게는 완벽한 드라마였던 <플리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유교걸’인 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행위들이 이어지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조소에 의존하는 나에게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았기에 나는 이 드라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섹스 중독과 자기 파괴적인 부분에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를 줄곧 떠올렸는데, 사실 이 작품이 공감은 훨씬 잘된다고 생각했다. 크엑걸의 주인공도 힘들어 보이긴 하는데, 그녀에겐 너무 좋은 친구가 많지 않은가. <플리백>쪽이 훨씬 현실적이다. 스쳐가는 어떤 사랑들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그 흔적들이 그녀를 살게 한다. 그리고 변했지만 변치 않는 그녀의 모습은 나 자신에게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여전히 조소에 젖어 사는 나일지라도 세상을 여전히 미워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