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감독판>을 보고
근 한 달간, 콘텐츠 업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는 쿠팡 플레이가 <안나>를 무작위로 재편집한 뒤 송출한 사건이었다. <안나>는 쿠팡 플레이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수지가 주연을 맡고 이주영 감독이 연출을 맡아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쿠팡을 불매하고 있어 쿠팡 플레이를 사용하는 것이 꺼림직했지만, 나 또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안나>를 시청했었다. 그때 나는 작품의 아쉬운 완결성에,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아직 한국에서 여성 원톱 주연물은 많지 않기에, 좋은 각본이 나와도 제작 과정에서 필터링되는 것도 많으니 그렇게 또 플랫한 작품이 됐구나 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쿠팡 플레이에서 공개된 <안나>는 그들이 단독으로 수정하여 8부작을 6부작으로 줄인 것이었고, 원본은 따로 있었다. <안나 감독판>이 그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행태에 나는 쿠팡 플레이 구독 취소를 하고 싶었지만, 감독판에 대한 궁금증을 이길 수 없었다. (아마도 이또한 마케팅 전략이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안나 감독판>을 보기 시작했고, 더 짧은 러닝타임에도 1주일에 걸쳐 시청한 <안나>와는 달리, <안나 감독판>은 이틀 동안 단숨에 마쳤다. 아는 내용임에도, 다른 이야기. “모든 장면에 의미가 있고” 디테일이 살아있고 후경이 풍부한 작품을 어찌 이리 납작하게 만든 것일까. <안나>는 한 여성이 큰 이유 없이 리플리 증후군에 빠져 거짓을 반복하다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이르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안나 감독판>의 이야기는 훨씬 복잡한 이야기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했고 똑똑한 탓에 꿈이 많았던 한 여자아이가 이미 사다리가 부러지고 만 이 사회에서 불가능한 계층 상승 욕망을 가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녀의 삶은 ‘리플리’의 삶보다는 ‘분홍신’을 닮았다. 극에 등장하는 현주의 빨간 구두를 신어보는 장면은 분명 ‘분홍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흔히 “원작을 이기는 작품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 쿠팡은 원작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이 이슈에 분노하는 사람들조차 구독을 유지하게 됨으로써 수익을 거둬들였다. 더불어 감독의 ‘안나’가 궁금했던 나는 첫 번째로 본 ‘안나’와 이 작품을 비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지만, 나는 이 작품이 좋아서 리뷰하기로 결심한 것이므로, 연출에 대한 비교는 있겠지만 쿠팡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다.
[이룰 수 없는 계층상승의 욕망]
유미의 첫 거짓말은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건넨 대학에 붙었다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거짓 대학생 신분을 얻게 되고, 연합동아리 활동으로 남자친구까지 사귀게 되며 함께 유학을 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거짓은 들통나기 마련, 사실을 알게된 남자친구는 유미를 공항에 두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유미는 혼자 남겨진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며 유학에 필요한 짐을 본가로 그대로 들고 돌아온 유미의 모습은 직부감으로 보여진다. 신의 시선에서 마치 유미를 심판하듯 보여지는 이 순간, 유미는 그저 동그란 작은 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감독은 유미가 그 많은 짐을 홀로 내리는 모습을 끊지 않고 보여준다. 이는 유미가 무거운 짐을 끌고 공항 앞에 망연자실한 채 비행기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는 장면과 대비된다. 이땅 너머의 세상은 유미의 것이 아니었고, 유미는 이땅에 있는 홍천에 돌아가 자신을 그토록 아끼던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쏟는다. 그렇게 유미는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한다.
고시원에 살며 다양한 알바 자리를 전전하던 유미는 학력무관의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현주가 있는 마레에 들어간다. 걸어 올라가기엔 무척이나 힘이 부치는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곳. 유미가 가쁜 숨을 내쉬며 면접을 보러 마레에 가는 동안, 현주는 차를 타고 쉽게 그 자리에 도착하여 처음부터 유미를 홀대한다. 그리고 유미는 매일 같이 그곳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곳의 잡일을 도맡아 한다. 가족 경영이 중심인 마레에서 이들 가족은 상층에 앉아 유미에게 지시하지만, 유미는 계단 아래로 재활용을 위해 상자를 옮기는 모습이 부감으로 잡혀 이들에 비해 작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잠시 쉬는 순간마저, 현주의 부름을 통해 저지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직장을 얻은 유미는 버텨보려 한다. 그러나 인격적 대우는 커녕 아픈 엄마를 보러 가기 위해 하루의 시간도 내지 못하는 삶에 유미는 결국 견뎌내지 못한다. 그렇게 유미는 마레에선 큰 돈도 아닐 소품샵의 돈통에 놓인 돈과, 현주의 서류들을 몇 가지 훔쳐 그곳을 달아난다. 그 내리막길에서 뛰다가 넘어져가면서. 아파가면서.
그러나 알바 경력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유미는 다시 거짓말을 시작한다. 유미가 잠시 재수생인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다니던 대학 선배 지원이 그 거짓말의 대상이다. 유미가 미술 관련 학위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왔다고 아는 지원은, 유미에게 해외 입시 전문 미술 학원에서 알바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소개한다. 이것이 유미가 ‘안나’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다. 있는 집 자제인 현주가 가진 학위는 티피컬하게도 미술사였고, 유미는 그때 훔친 서류 중 하나인 그녀의 졸업증서를 활용한다. 그리고 현주의 영어 이름인 안나가 되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야하는 법임을 유미는 마레에서 배웠다. 현주가 입었던 옷과 같은 명품 옷들을 동대문에서 카피로나마 사서 입고, 더불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유미의 안나로서의 모습에 속아 넘어간다. 상류층 남성보다도 더, 상류층 여성은 더 아름다워야 하고 교양 있어야 한다. 유미는 그것을 알기에 실천한다.
그렇게 그 삶이 자연스러워졌을 즈음, 유미는 결혼을 한다. 그렇게 유미가 남편 지훈과 함께 살게된 집에서 유미는 현주를 마주한다. 같은 집에 사는 유미를 보고 놀라, 로또라도 맞았냐며 비웃는 현주의 말에 떨리는 유미의 발이 비춰진다. 그녀를 피해 유미는 23층을 계단으로 다니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곧 현주는 유미에게 온 우편물로 진실을 알아낸다. 그만하겠다고 정리하겠다고 말하지만, 유미도 알 것이다. 이것은 쉽게 멈출 수 없는 일이다.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다, 굽이 부러져 또는 너무 지쳐 하이힐을 벗고 계단을 올라도, 그는 결코 그 ‘분홍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훈과 결혼하고 살게 된 23층의 아파트에서 현주를 만난 뒤 안나로서의 유미의 삶은 최초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먼저 유미는 현주를 만나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현주에게 신분을 들킨 뒤에는 자신의 집인 23층에서 유미는 현주 앞에 주저 앉아 무릎을 꿇고 다시 낮은 사람이 된다. 거짓으로 얻은 신분은 영원할 수 없다.
[전경을 넘어 후경이 들려주는 이야기]
사실상 유미, 현주, 지원, 지훈 이 네 명이 주인공이었다는 <안나 감독판>은 이들의 삶의 전사 또한 이해할 수 있도록 담아낸다. 다른 꿈이 있었으나 그꿈을 포기한 현주, 어릴 적부터 정의감이 가득했던 지원, 세상 물정 모르는 아버지 밑에서 겨우 자신만의 삶을 구축해내 자수성가한 지훈의 모습까지. <안나>의 경우 수지라는 스타 배우를 내세워 클로즈업 샷을 위주로 작품이 전개되었다면, <안나 감독판>의 이야기는 다르다. 원래 후경이란 주로 작품에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배경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안나>는 삭제된 장면이 많고, 그것 자체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는 인물 행동의 동인이 되기도 한다.
네 가지의 기억나는 씬이 있다. 첫 번째는 유미가 대학에 붙었다는 거짓이 지원에게까지 닿으면서 함께 대학교에 갔다가 캠퍼스에 앉아있던 장면이다. 지원의 호의에 기쁘면서도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에 유미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안나 감독판>에서는 유미가 자신이 거짓말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훨씬 더 섬세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퍼스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대학생들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는 순간, 유미에게 신입생이 건물의 위치를 묻는다. 그 건물은 우연히도 지원이 자신의 동아리가 있다며 초대한 공간. 자신이 아는 공간이기에 신입생에게 유미는 건물의 위치를 알려주게 되고, 이는 유미가 느낀 모종의 소속감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유미가 남편인 지훈에게 부탁해 자신도 모르게 보국일보(이름 있는 언론사)로 이직하여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지원의 모습이다. 불의에 응하지 않는 지원이지만, 버텨보겠다는 마음으로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지원은 <안나>에서도 드러나지만, <안나 감독판>에는 그 뒷편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끌끌 차는 식당 아주머니가 있다. 세 번째는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다. 유미의 에피소드 중 완전히 삭제된 고시원 총무의 성희롱 에피소드. 지원과 유미는 이 상황에 그저 순응하는 존재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쉽게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젊은 여성, 그것도 가난한 젊은 여성의 삶이다.
네 번째로 기억에 남는 씬은 유미(안나)가 선거 유세 현장에서 멀리서 마레에서 만나 유일하게 마음을 나눈 선우를 발견하고 전화를 건 순간을 그녀의 수행비서인 다른 유미가 목격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때 유미는 안나가 안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 또한 삭제된 컷 중 하나인데, 이런 중요한 장면들의 삭제는 작품의 유기성을 해친다.
[보풀이 만드는 디테일]
보풀은 흔히들 제거해야할 대상이다. 그리고 보풀은 오래되고 저렴한 겨울옷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이물이다. 삭제된 디테일은 너무나 많아서 전부 언급하는건 입이 아플 정도지만, 보풀에 대한 이야기만은 꼭 하고 싶다. 마레에서 일을 하던 유미는 현주의 부탁으로 백화점에 코트를 찾으러 간다. 코트의 주인이 유미인 줄 알고 백화점 직원은 그와 어울리는 캐시미어 목도리를 권한다. 유미는 자신의 월급에 너무나 부담스러운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목도리를 사온다. 유미에게도 온전한 자신의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싼 가구와 비싼 옷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지만 자신의 것은 없는 것은 박탈감이 느껴지는 일이었을테니까. 그러나 유미가 입은 코트에는 보풀이 가득하다. 자주 입고 저렴한 옷엔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보풀. 유미는 캐시미어 목도리를 매고 코트의 보풀을 제거한다.
그렇게 겨우 보풀이 없게 코트를 손질했을 때, 유미에게 찾아온 것이 고시원 총무이고 그때 벌어지는 일이 식당에서의 성추행이다. 여기저기서 치이는 지겨운 삶. 유미가 안나의 삶을 선망한 것은 단순히 비싸고 아름답고 정갈한 옷을 입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녀는 고시원 총무에게 말한다. “너 이 새끼, 씨발, 내가 만만하구나”. 그리고 그녀는 유미로서는 그나마 안정된 삶을 누렸지만 매일이 홀대의 연속이었던 마레에서의 잠시 동안의 뒷풀이에서 “남들이 날 두려워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드러낸다. 물론 거짓으로 얼룩진 남의 삶을 얻은 것은 영원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현주는 자신의 이름을 훔쳐 산 유미에게 노력을 좀 더 하지 그랬냐고 말한다. 유미의 모든 선택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유미는 노력했다. 이 또한 삭제된 장면이지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자 했고, 사이버 대학에 진학할 고민도 했다. 그러나 이는 돈과 시간의 문제로 좌절된다. 대신 한 번의 거짓이 불러온 거짓의 연쇄에 발을 맡기고, 유미는 안나가 되고자 노력한다. 안나가 얻은 학위에 걸맞은 지식을 가지기 위해, 상류층의 여성에 걸맞은 옷을 입고 태도를 갖추기 위해 유미는 끝없이 노력한다. 어린 시절 유미는 나와 너무나 닮아 있어 마음이 쓰였다. 지방에서 태어나 가난하지만 똑똑한 여자아이라는 설정은 솔직히 문득문득 유미와 나를 동일시하게 만들었으니까. 한 번 더 보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여유가 없어 아쉽다. <안나 감독판> 지금 쿠플 1위던데, 제발 감독님 승소하셔서 저 작품을 다른 OTT로 옮겨주신다면 그곳이 어디든 따라가서 한 번 더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