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을 보고
일찍이 윤가은은 아무런 정보 없이 <세계의 주인>을 보러 와 주길 당부한 바 있다. 상영 초반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도 이에 공감한 듯 하다. 정보를 모르고 갔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며 영화를 추천했다. 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언제나 내가 살아보지 못 한 다른 이의 세계를 잠시나마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영화가 주는 어떤 상처는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이 영화도 그런 영화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최소한의 정보값만을 가진 채 영화를 관람하러 극장을 찾았다.
작품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작품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작품이구나. 그러나 이 상처가 ‘필요한 상처’인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정보값 없이 보아야 하는 작품이 아니라, 트리거 워닝이 필요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세계의 주인>이 마냥 가벼운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예고편으로도 유추된다. 혼란스러운 성장기의 여성 청소년의 모습에는 무거운 음악이 덧입혀진다. 서사란 갈등을 수반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이유가 무엇이냐가 작품의 흐름을 결정한다. <세계의 주인> 속 갈등의 소재는 ‘성폭력 피해’이다. 사랑과 우정이 인생의 주요 고민인 듯한 평범한 주인에게는 ‘성폭력 피해’라는 과거가 있다.
이 과거가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주인과 같은 반 친구인 수호는 ‘아동 성폭력 가해자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을 추진한다. 운동의 목적을 알리는 수호의 발표에 주인은 어딘가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카메라는 굳이 그 모습을 담아낸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다. 주인에게 서명록에 싸인을 요청하는 수호. 주인은 서명록에 쓰인 문장 하나를 지적한다. “성폭력은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남기며,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다”. 주인은 이 문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서명을 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명을 요청하는 수호에게 주인은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라며 화를 낸다. 하지만 주인은 그 발화가 진실이 아니라는 듯 상황을 눙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주인의 말이 진심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터질 것은 터지기 마련이다. 서명 운동을 마치고 싶은 수호는 주인에게 서명을 지속적으로 요청한다. 수호의 모습은 정의롭다. 하지만 수호가 서명 운동을 하는 이유는 피해자의 상처를 고려하여 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당위’에 의존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그렇게 타자화 된 성폭력 피해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주인은 결국 참지 못한다. 몸싸움을 하고, 교장실에 불려가는 주인. 주인은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였지만 잘 살아가고 있다며, 수호가 성폭력 피해가 영혼을 망치는 일이라는 사고를 바꾸기를 요청한다.
이후의 시간은 잊은 줄만 알았던, 또는 괜찮아진지만 알았던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는 일이다. 주인의 이야기는 교내에 퍼져 나가고, 아이들은 2차 가해성 발화를 일삼는다. 여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시선이 그렇듯, 아이들의 시선 속에 주인이라는 인물의 입체성은 지워지고 피해 사실만이 남는다.
2차 가해성 발화들을 들으며 생각했다. 과연 이게 관객들에게 전해야 할 ‘필요한 상처’일까. 과연 소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홍보 방식이었을까. 누군가에게 이같은 발화는 ‘필요한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그저 무방비하게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다시 듣는 순간을 만들 뿐이다. 차라리 트리거 워닝을 했더라면 이 작품을 좀 더 좋게 볼 수 있었으려나.
주인에게 남은 상처에 대한 직유적인 연출도 불쾌했다. 무언가를 사라지게 해보겠다고 노력해도 결국은 눈속임인 동생의 마술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학교를 뛰쳐나가 마음을 달래고자 간 강가에서 주인이 발견하는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직유는 편리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안고 살아가야 할 상처는 훨씬 더 섬세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주인은 살아간다. 주인의 친구들은 섬세하지 못 할 뿐 사실은 다정한 사람들이다. 주인에게는 자신의 피해를 이해하는 자조 모임도 있다. 주인의 피해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주인의 세계는 부러울 정도로 다정하고 무해하다.
그러나 작품이 추구하는 ‘봉합’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작품의 분기점을 만들어온 것은 익명의 인물로부터 온 쪽지였다. 2차 가해성 메시지에 주인은 상처를 받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메시지는 다르다. 나도 너였다는 말, 너의 용기에 나도 힘을 얻었다는 말. 이 말들은 교실의 수많은 인물들을 비추며 이어진다. 너무나 쉬운 결론이다. 연대 없는 연대, 위로 없는 위로에 공허한 감정을 느꼈다.
단편 <해미를 찾아서>를 떠올렸다. 대학 내 한 명의 교수로부터 입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 연대하는 이들은 ‘해미’로 불리운다. 교수의 소설에 쓰인 ‘해미’라는 이름. 그는 아마 학생들을 ‘해미’라 불렀던 것 같다. 단편은 ‘해미’의 이름에 빈칸들을 준다. 그리고 나는 ‘해미’의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주인의 세계’ 속에 이입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이 작품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불필요한 상처에 불쾌한 눈물을 쏟았다.
이 작품이 상업영화계에서 나왔으면 어땠을까. ‘성폭력 피해’에 대해 괜찮게 다룬 작품이라 생각하며, 한국영화계와 이 세계가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윤가은의 영화이며, 독립 영화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조금은 섬세했다면 이 작품에 만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계의 주인>은 10만 관객을 넘어섰다. 나에게는 아쉬운 작품이었으나, 이같은 소재에 대한 좋은 입문서격의 작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더 나은, 더 깊은 작품을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